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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 청동기시대 취락 연구

Title
한강유역 청동기시대 취락 연구
Other Titles
Comparative Research on Bronze Age settlements in the Han River Basin
Author
김 현준
Alternative Author(s)
Kim Hyun Joon
Advisor(s)
배기동
Issue Date
2017-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국 문 요 지 본 연구는 한강본류역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편년, 주거지와 각종 시설물의 구조 및 규모 분석을 토대로 한강본류역과 북한강유역 취락의 상이점을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기획 및 진행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청동기시대 전 기간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공간적으로는 수계를 기준으로 한강본류역과 북한강유역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Ⅳ장에서는 취락에서 확인되는 유구 및 유물 자료를 이용하여 편년을 시도하였는데, 현재 청동기시대 시기 구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청동기시대 3분기설을 이용하였다. 이는 3분기설이 지역적 문화상에서 나타나는 유구 및 유물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으며, 중기의 역동적인 문화상을 가장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 전기는 전반ㆍ후반으로, 중기도 전반ㆍ후반으로, 그리고 후기의 3시기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ⅤㆍⅥ장에서는 유적의 분포와 입지 양상을 분석하였다. 청동기시대 취락의 입지는 한강본류역은 주로 구릉지역에, 북한강유역은 江岸의 충적지에 취락이 자리하고 있다. 주로 구릉 정상부에 취락이 입지하는 전기 전반에는 소사동, 운양동, 내삼미동에서 단위주거군의 양상이 확인된다. 전기전반 이후가 되면 마을이 처음 조성되는 시점에 정상부의 평탄한 공간(능선)상에 주거지가 구축되었는데 계획적으로 배치되었다기보다는, 여유공간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중기취락의 구조적 특징으로는 주거 및 저장, 매장공간으로 다양화되며, 구릉 사면에서의 군집화와 함께 한강본류역의 경우 주거유적과 분묘와의 공존을 들 수 있으며, 중기후반이 되면 전단계보다 주거지가 사면 하단에 위치하며, 군집화의 정도가 강해진다. 이후 외곽으로 배치되는 경향이 강해지다가 주거군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중기에는 취락의 단위주거군이 늘어나고, 공방과 굴립주건물, 수혈유구가 중가한다. 거례리유적은 약 15개군의 단위주거군이 조성되는데, 3~5구간에서는 굴립주건물과 공방이 증가한다. 특히, 3구간에서는 굴립주건물이 눈에 띈다. Ⅷ장은, 취락의 구조와 발달이란 측면에서 한강본류역과 북한강유역 취락의 비교를 시도하였다. 한강본류역의 취락은 전기부터 단위주거군이 형성되며 중기로 발전하면서 응집된 취락도 조성되지만, 분산된 취락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경우가 다수이다. 북한강유역 전기 전반 취락은 1~5동 정도의 규모를 보이는데, 철정리ㆍ거례리 유적에서는 10동, 중도유적에서는 11동이 확인되었다. 전기 후반이 되면, 취락의 수가 늘어나고, 선상 배치는 유지되며, 강의 안쪽으로 일부 배치되는 경향을 보이며 군집화된다. 전기의 한강본류역에서는 의례행위와 관련된 환구취락이 교문동에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한강본류역 환구취락은 전기전반부터 후기까지 이어지며, 변함없이 지속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북한강유역에서는 중도유적에서 환호가 발견된 이래, 여타 다른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한강본류역과는 다른 지역적 특색도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제의행위의 양상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기에는 양 지역에서 취락의 양적 팽창이 두드러진다. 한강본류역에서는 주거와 분묘가 결합된 취락이 등장하며, 전기의 문화요소가 계속 이어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강본류역에서는 중기에 새로 출현한 취락이 다수 확인되는데, 이 시기 한강본류역 취락 규모 확장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북한강유역에서는 전기 취락의 공간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 주거군의 확장과 시설이 발전해 가는 양상이 관찰된다. 취락 규모의 확대는 인구증가를 야기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요구된 확장된 식량 저장은 고상가옥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도에서 확인되는 주거군과 경작지대의 중간에 배치된 고상가옥은 잉여생산물의 효과적인 관리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구릉지역인 한강본류역의 경우 고상가옥은 제한적으로만 설치 가능했을 것이므로 수혈을 포함한 다른 시설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중기전반에는 한강본류역에 주거유적과 결합되어 분묘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북한강유역에서는 전기에 이미 석관묘, 주구묘 등이 비교적 군집을 이루어 확인되고 있는데, 천전리 철정리Ⅱ유적에서는 주구묘가 더욱 군집되며 주거공간과 매장공간의 분리 현상이 더욱 가속화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구묘가 이 지역 전통적인 묘제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고, 지역의 거점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취락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피장자가 권위자의 무덤일 것으로 보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중기의 만정리 신기, 수월암리유적의 분묘의 존재로 보았을 때 이미 공간분리는 어느정도 이루어졌고, 수월암리의 주거지 14동, 지석묘 27기로 보았을 때, 수월암리유적은 주변 몇 개 취락을 대상으로 하나의 집단 묘역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파악된다. 이와 같이 양 지역의 분묘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그 변천과정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북한강유역에서 대규모이며 장기지속적으로 한 곳을 점유하며 운영된 취락에서, 전기부터 이러한 묘제의 출현 양상은 지역 거점취락과도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에 한강본류역에는 소사동, 양촌유적에서도 분묘는 존재하지 않고, 두 유적을 제외하고는 지역거점으로 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취락은 확인되지 않는다. 소사동, 양촌, 양교리 일대, 당동리유적은 5~12개소의 분산된 지점으로 구성되어 있어, 취락내부의 중심구역에서 마을 전체 및 일부 구역을 관리하는 역할, 또는 각 구역에서의 역할이 있어 서로 협업 체계가 잘 이루어진 취락으로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기후반에는 양 지역 모두 취락의 규모가 감소한다. 한강본류역의 島嶼地域과 북한강유역의 철정리Ⅱ, 달전리유적 일부 지역에서는 취락 운영이 지속되고 확장되는 면이 보이지만, 대부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거례리와 같은 응집된 취락에서도 규모가 절반이하로 줄어든다. 이는 제한된 지역에서 인구의 증가가 한계가 있음을 내포하는 것인데, 북한강유역 취락은 전기전반부터 동일 공간에 지속된 취락이 다수이다. 이들 취락들은 중기후반까지 어느 정도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켰지만, 이후 어느 시점에는 한계를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URI
http://hdl.handle.net/20.500.11754/33328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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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CULTURAL ANTHROPOLOGY(문화인류학과) > These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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