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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양광도 지역 도기 가마 연구

Title
고려시대 양광도 지역 도기 가마 연구
Author
서승희
Advisor(s)
안신원
Issue Date
2017-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오늘날 경기도 일부와 충청도 일대인 양광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요지 28개소 가마 70기를 연구대상으로 고려시대 도기 가마의 시기별 특징과 변천배경을 파악하고, 가마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가마 기 수, 출토 유물, 요지 주변의 추정 소비지를 종합하여 고려시대 도기 가마의 생산방식과 운영주체를 보고자 하였다. 도기 편년과 관련된 선행연구와 보고서에 제시된 절대연대측정치를 교차 확인한 결과, 도기 가마의 시기상을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었다. 편년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견이 없다고 판단하여 형식 분류 전에, 고려 전 시기를 3 단계로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마의 구조적 속성을 검토하였다. 속성 검토는 가마 외· 내부의 속성 모두를 대상으로 일원분산분석과 카이제곱검정을 통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속성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동시에 빈도순서배열법으로 시기별 변화 양상이 비교적 뚜렷한 속성을 보았다. 이를 종합한 결과, 유의미한 속성은 배수시설 유무·단 유무·소성부 계단 유무임을 확인하였고 이를 토대로 형식을 IAa부터 IIBb까지 8가지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연구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IBb식과 IBa식을 제외한 6가지 형식을 통해 시기별 가마 구조의 변화상을 볼 수 있었다. 형식에 사용된 속성 외에, 장단비를 근거로 도출한 평면 형태와 소성부 규모는 상자그림 상에서 시기별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형식 분류에서 제외하였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시기 차이보다는 주변 소비지의 수요량, 가마의 1회 생산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형식을 설정하기 위한 속성으로 고려하기보다는 시기별 경향성으로 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양광도 도기 가마의 시기별 변천과 특징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대부분 I기의 형식이 II기까지 지속되지만 배수시설이 포함된 형식은 사라지거나 감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II기에는 I기에 비해 단과 계단이 시설된 형식이 급증하여 동시에 나타나거나 혹은 따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벽과 계단시설은 음성 오궁리와 당진 대운산리 유적의 예와 같이 I기에 일부 나타나기도 하지만 II·III기와 비교해 볼 때 그 비율이 확연히 낮다. III기에는 배수시설이 존재하는 가마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이전보다 단과 계단이 각각 또는 동시에 설치된 예의 비율이 증가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시기 통틀어 배수시설, 단, 계단시설이 모두 설치되지 않은 IIAa식의 비율이 가장 크기 때문에, 이 형식이 당시에 가장 보편적인 도기 가마였음을 추정하였다. 그리고 과도기인 II기(12세기 중심)를 거치면서 배수시설의 유→무, 단의 무→유, 계단시설의 무→유로 변화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형식 외에 시기별 차이를 보여주는 속성인 장단비(평면형태)와 소성부 규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른 시기에는 장단비가 비교적 큰 초세장타와 세장타원형이 주를 이룬다. 상자 그림 상에서도 I~II기의 장단비 중위수가 가장 높으나(2.49 및 2.885) III기로 가면서 그 수치가 감소하여(2.34) 장단비가 작은 타원형 중심의 가마가 축조된다. 소성부 규모 또한 III기로 갈수록 중위수가 감소한다(8.16→3.96). 이러한 양상에 대해, 먼저 구조적 측면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II기를 기점으로 II~III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축조 기술의 변화(단과 계단의 설치)는 소성과정을 좀 더 안정적·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있다.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의 거란과의 전쟁(3차)와 11세기 후반~12세기 초의 여진과의 전쟁을 겪으며 이를 기점으로 복구 과정에서 이전보다 더 효율적인 시설을 가마에 도입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계단시설은 소수의 가마에서 시설되었던 것이 II기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공주 계실리 1·2호(고지자기 측정치는 각각 1175±30과 1210±30)를 거쳐 II~III기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본격적으로 시설된 것이다. 또한 거란·여진과의 전쟁과 이후, 13세기 몽고의 6차례 침입으로 파괴된 가마는 개축 혹은 보축 과정을 통해 새로운 요소를 계속적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규모 변화에 대한 요인으로는 6차례에 걸친 여몽전쟁과 12세기부터 시작된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 수 있다. 13세기 약 40여 년간의 전쟁 기간 중, 파괴-복구가 빈번해지면서 도기의 수요량이 증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다수의 소규모 가마를 운영함으로써 수비-성형-건조-소성-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몽고군의 침입로를 보면 주요 항전지인 처인현과 광주목, 충주목이 모두 양광도에 속하는 속현 혹은 읍치인 것은 여-몽 전쟁 동안에 양광도의 피해가 컸음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또는 권력자의 수탈로 대표되는 무신정권기의 모순으로 인해 군현민과 소민들의 유망이 가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관영 장인들 또한 본거지를 옮겨 다니며 개인(소수의 사람)이 운영할 수 있는 소규모 사요를 운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고려시대 도기 가마의 생산방식과 운영주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먼저 요지의 가마 군집도를 근거로 생산방식을 소~대규모군으로 분류하였다. 그 결과 소규모 가마군>중규모 가마군>대규모 가마군 순으로 점유 비율이 높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중 소규모군은 전체의 68%를 차지하여 가장 보편적인 생산방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중규모, 대규모군 가마는 각각 24.5%, 4.5%를 차지하여 소규모군에 비해 운영 빈도가 적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가마군을 가마의 위치와 출토 유물, 주변의 추정 소비지의 존재 유무로 생산 주체와 성격을 추정한 결과, 세 가지 생산방식은 모두 민영 수공업(가내 수공업 및 사찰 수공업 포함), 관영 수공업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군집별로 민영 수공업(가내 및 사찰수공업) 혹은 관영 수공업임을 단정할 수 없지만 군집군이 클수록, 특수 기종의 유물이 확인될수록, 가마 기 수가 많을수록 개인 도공에 의한 가내수공업보다는 민영수공업 중에서의 사찰수공업 또는 관청수공업과 관련될 확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URI
http://hdl.handle.net/20.500.11754/33325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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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CULTURAL ANTHROPOLOGY(문화인류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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