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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시대 한성부 시전 공간 연구

Title
조선~대한제국 시대 한성부 시전 공간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Hanseongbu(漢城府) Sijeon(市廛) Licensed-markets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Periods
Author
정수인
Alternative Author(s)
Jeong, Su-In
Advisor(s)
한동수
Issue Date
2022. 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본 논문은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서 위상을 갖추기 위해 궁궐, 종묘, 도로와 함께 건설된 시전 행랑을 조명하는 연구이다. 한양의 주요 도로인 종로, 남대문로, 돈화문로에 건설된 행랑은 시전, 관공서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고, 한양의 도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초기 한양 건설에 관한 연구는 주로 궁궐, 종묘 등 주요 시설과 도로 건설 등에 초점이 맞춰있었으며, 행랑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종로 주변 발굴조사가 연차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조선시대 행랑의 실체가 드러났다. 청진지구 발굴에서 조선 초기 일률적으로 건설된 행랑의 형식이 나타났다. 발굴의 성과를 기초로 각종 지도, 도면, 문헌 자료를 검토하여 조선 초기 시전의 설치부터 대한제국기 시전의 위치, 건축 형태를 분석하였다. 더불어 동시대에 건설된 돈화문로 행랑과 시전 행랑을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살펴보았으며, 한양 시전 이전에 설치된 개성 시전과 조선 후기에 건립된 수원 시전과도 비교 검토하였다. 한양 시전이 도시에 미친 영향을 도시조직, 행정구역, 거주지 등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 10년(1410) 시전 구역이 정해지고, 태종 12~14년에 행랑이 완성되었다. 이후 태종, 성종 대에 몇 차례 시전이 추가 건설되었다. 조선 전기 시전 행랑 구역은 혜정교에서 종묘 입구, 종루에서 광통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행랑이 건설된 부분을 1912년 지적원도에서 찾아보면 종로 혜정교 인근에서 종묘 입구까지는 도로 양측으로 행랑 흔적이 나타나고, 종묘 입구에서 연지동 입구까지는 종로 북측만 행랑 필지가 보인다. 남대문로는 도로 양측에 행랑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종묘 입구에서 연지동 입구의 행랑은 성종 대에 좁은 시전 행랑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건설된 구간이다. 행랑이 위치한 필지와 물길과의 관계를 보면 행랑 후면부에 행랑과 평행하게 물길이 지나가는 것이 확인된다. 행랑은 물길의 정비와 연관하여 건설된 것으로 태종 대에 개천도감이 시전 행랑의 터 잡기 공사를 한 후 개천도감은 행랑도감으로 명칭이 바뀌어 행랑 건설을 진행하였다. 세종 대의 홍수로 육조거리 일대가 잠기자 행랑 뒤에 물길을 만들어 개천의 유량을 분산시켰다. 조선 초기 대시(大市) 구역은 장통방과 경행방 사이로 원각사 서쪽에서 돈화문로 입구 파자교 근처이다. 이후 시전의 중심지역은 종루 일대로 변경되는데 이는 세조 10년에 건설된 원각사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원각사의 건축과 돈화문로의 잦은 왕의 행차로 기존의 대시 구역은 상업 행위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시전은 종루 일대를 중심으로 육조거리, 이현 등지에 분포하였다. 동시에 종루 주변의 시전은 국역의 부담이 높은 입전, 백목전, 면주전, 포전, 어물전 등의 유분각전(有分各廛)이 위치하였다. 혜정교~철물교, 종루~광통교까지는 시전이 조밀하게 위치했으며, 철물교에서 종묘 입구까지는 4~5개의 시전만 확인되어 시전과 시전 외 용도의 행랑이 혼재하였다. 이현의 시전은 정부에서 제공한 관용 행랑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전은 한양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행정구역 ‘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성부의 계 중에서 시전 관련 계는 전체 계 중에서 34곳으로 약 10%를 차지하였다. 시전 관련 계는 훈도방, 서소문 밖에 있는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로 시전 행랑 구역에 있었다. 시전과 시전 관련 계가 인접한 경우는 대부분 종루 인근이었다. 시전과 동종 계가 분리된 경우를 보면, 시전은 종루 일대에 있고 동종 계는 원각사 서쪽에서 종묘 입구에 있었다. 이는 원래 시전과 동종 계가 함께 있었다가 시전은 상권이 좋은 종루 인근으로 이전하고 동종 계는 기존의 장소에 남아있는 경우로 해석하였다. 1912년 토지조사의 공동소유필지를 통하여 시전의 위치를 분석하였다. 종로와 남대문로 인근 공동소유토지 38개에서 25개 시전의 종류를 파악하였다. 대부분 종루 근처에 시전들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시전 전방은 도로 변에 위치하고 시전 도가는 그 후면부에 위치하였다. 일부 시전의 경우 경영 악화로 도가를 매각하고 전방과 도로에서 떨어진 안쪽 구역으로 이동하였다. 시전의 지점 형식인 시전 재가는 한성부 호적에서 상인 1인이 거주하는 경우로 산정하였다. 시전 재가는 시전의 주변인 장통방, 견평방, 관인방, 서린방 등에서 나타났다. 시전 상인들의 거주지는 1912년 토지조사부에서 시전 토지의 공동소유자 명단으로 파악하였다. 시전 주변인 견평방, 장통방 등에 거주하는 경우가 21.3.%로 다소 높게 나타났으나, 인달방, 순화방, 반석․반송방에 거주하는 경우가 34.7%로 가장 높았다. 이는 조선 후기 한양 서부의 발달로 한양의 많은 사람들이 서부에 많이 몰려 살았던 것을 반영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한성부 호적과 1912년 토지소유 관계를 살펴보면 시전 뒤에는 상인들이 거주하였으나, 동종의 시전 상인이 거주하지는 않았다. 이는 대한제국기 시전의 조직체제가 점차 와해 되고 경영의 어려움으로 종로 주변 주요 토지들을 신흥 자본가들이 매입하면서 시전 상인들의 거주지도 변화하게 된 것이다. 종루 일대에 있는 시전의 건물 형태는 발굴도면, 사진, 근대 가옥도면 등을 활용하여 분석하였다. 시전은 ‘도중’이라는 시전 조직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으며 독립된 방(房)별로 판매가 이루어졌다. 물품관리, 공간 사용, 판매수익 등을 방별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건축 공간도 독립된 형태였다. 한 건물에 있더라도 방별로 별도의 출입문이 있었고, 소비자가 움직일 수 있는 마당이 있어 구획된 개별 판매공간으로 진입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토지에 하나의 건물이 있고, 방 1개가 운영되는 구조라면 출입문이 1개가 있는 건물 형태인 것이다. 발굴 성과로 나타난 시전 기본형은 1개의 방을 구성하는 단위였다. 그래서 종로 변의 시전 기본형이 연속된 형태의 필지의 경우 방의 개수가 필지의 전면 폭으로 결정되었다. 시전 건물의 형태는 마당의 형태에 크게 따라 통로형과 중정형으로 구분하고, 중층과 단층, 전면 개방 여부에 따라 구분하여 유형화 하였다. 동상전과 입전 화초방, 입전 후방, 입전 말방 등은 중정형이었으며, 망문상전, 저포전, 지사전 등은 단층 통로형, 서쪽 지전은 단층 통로형(가로변 개방), 백목전, 포전, 청포전, 혜전은 중층 통로형으로 구분하였다. 종로 및 남대문로와 인접한 건물은 관용 행랑 형식이었고 후면의 건물들은 개별 건축행위로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ㅡ’자형에서 후대에 갈수록 평면 구성이 자유로워졌다. 시전의 후면부는 시전이 거대 조직화 되면서 공동의 공간으로서 도가를 마련하고 개별적으로 건축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또한 대한제국기 시전 건물들은 경성상업회의소, 한일은행 등 근대적 기관으로 활용되었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시전이 접근이 용이하다는 위치적 이점과 함께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심의 넓은 공적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개성의 시전과 한양의 시전을 비교해보면 개성의 시전은 도로 구분 없이 전방과 도가가 일체화된 구조이며, 한양 시전은 피맛길로 전방과 도가가 분리되어 있었다. 전방과 도가를 합친 깊이는 한양과 개성 모두 약 25m로 나타나 크기의 연관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성 시전 전방은 약 3.6m 깊이이며 폭은 자유로운 형식으로 한양의 시전 전방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이는 한양 전방의 아궁이 부분을 제외한 크기와 유사하다. 한양의 시전이 개성의 시전과 달리 전방과 도가가 피맛길로 분리된 점은 온돌의 사용으로 화재를 대비한 이격이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피맛길의 초기 의도는 시전 상인들의 내부 사도로(私道路) 개념으로 출발한 것이다. 종로의 시전 행랑 필지와 돈화문로 행랑 필지를 비교하면 시전 행랑 필지는 2열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종로 북측은 청진동길 입구에서 인사동길 입구까지, 종로 남측은 종루에서 종묘 입구까지가 2열의 필지 구조이다. 이 구간은 모두 시전이 위치하고 있다. 반면 돈화문로는 도로 양측으로 1열의 행랑 필지가 이어져 있다. 돈화문로는 전면 폭 47m, 측면 깊이 14m의 기본형이 반복되어 구성되었다. 돈화문 앞을 시작으로 3개의 기본형이 연속되고 양측 도로로 분리되었다. 종로의 경우는 필지 분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필지의 기본형과 반복성이 1912년 지적원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종로 시전 행랑은 2열 구조로 종로 변 필지는 약 10m 깊이, 2열의 깊이는 25m를 나타내었고, 돈화문로와 그 외 1열 행랑 필지의 깊이는 약 14m였다. 한양의 주요 도로인 종로와 남대문로에 건설된 시전은 도로 양측에 2열 구조의 필지를 만들어냈으며, 전방과 도가 사이의 내부 도로로서 피맛길을 형성하였다. 시전의 형성은 물길의 정비와 함께 진행되어 시전 행랑과 평행한 물길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시전 건물은 독특한 시전의 운영방식이 반영된 결과로서 독립된 방별로 관리되는 공간 구조였다. 한양 시전은 필지, 건축, 도로, 물길에 영향을 미쳤고, 한양의 도시공간구조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URI
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628367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86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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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SUSTAINABLE ARCHITECTURAL ENGINEERING(건축환경공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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