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4 0

19세기 히바 칸국과 러시아제국의 외교관계 연구:

Title
19세기 히바 칸국과 러시아제국의 외교관계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hiva Khanate and Russian Empire in the 19th Century: Focused on the Main Diplomatic Issues
Author
곽성웅
Alternative Author(s)
Kwak, Song Woong
Advisor(s)
엄구호
Issue Date
2020-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본고의 주제는 19세기 히바 칸국과 러시아제국의 외교 관계에 관한 연구이다. 본고는 역사적 분석을 통해 기존 연구가 주목하지 않았던 양국 외교 관계의 상호작용적 측면을 부각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와 경쟁, 역할 등이 19세기 중앙아시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주류 연구의 시각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19세기의 히바-러시아 외교 관계를 전반적으로 요약해 본다면 근대적 인권 보장 개념에 대한 견해차가 무력으로 해결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히바와 러시아의 관계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해방을 위한 미국 남북전쟁과 영국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국제적인 무력간섭 역시 19세기에 나타났다. 결국, 19세기의 시대정신은 노예제 폐지의 흐름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히바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중심축인 근대적 인권 보호 개념과 결부된 노예 문제와 국경 문제가 근본 원인이었다. 이러한 양국의 견해차는 서로에 대한 인식의 기반에서 비롯된 것이다. 먼저, 19세기 혹은 그 이전부터 러시아는 아시아를 기본적으로 ‘야만성’과 ‘(전투적인) 이슬람’이라는 선입견 속에서 인식했다. 서투르키스탄의 히바 칸국이 이러한 이미지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무라비요프가 폭로한 히바는 19세기 내내 러시아인을 노예로 약탈하고 매매하는 야만적인 비즈니스를 자행하는 반문명의 국가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이 무슬림 칸국은 지속적으로 러시아의 남부 국경 지역에서 유목하는 카자흐족을 선동하여 분란을 조성하는 공격적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1873년에 러시아제국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히바 칸국을 정복한 것은 중앙아시아에서 문명이 야만을 극복한 사건으로 러시아의 역사에 기록됐다. 반면에 히바는 러시아에 대해 고착화된 양면적 이미지를 고집했다. 역사적으로 히바의 칸들은 두려움 섞인 경외감을 표출하면서 러시아가 히바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기만을 기대했다. 그런데 칸들의 그러한 태도가 민간 차원의 사회 문제에서는 동일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히바는 비무슬림 러시아인의 노예 매매와 약탈 문제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히바의 칸은 러시아 정부와 시민을 차별적으로 간주하여 대우했다. 러시아는 히바의 이런 태도를 교정하도록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히바가 두려워하는 수단인 무력을 동원했다. 국경 문제 역시 1873년 전쟁의 주요한 원인이자 19세기 양국 관계의 심각한 외교적 쟁점이었다. 기본적으로 국경 문제는 노예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국경침입을 통해 노예약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9세기 내내 러시아는 남부 변방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히바는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 있는 유목민족을 통제하려고 했다. 양국의 정책은 접점인 카자흐 문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839년과 1873년에 발발한 전쟁 모두 카자흐족을 둘러싼 양국 간 축적된 갈등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히바-러시아 외교 관계에 있어 히바 내부 정세 및 중앙아시아 서부의 역내외 관계 변화에 대한 분석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특히 히바 칸국은 국내변수로 인해 급변하는 서투르키스탄 지역 정세에서 스스로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며 국제적 연대 결성의 호기를 놓치기도 했다. 그 국내변수의 대표적인 사건이 동란의 시대였다. 1855년부터 시작된 동란의 시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히바의 칸은 내정에 몰두하면서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도외시했다. 히바는 코칸드가 주도한 대러시아 연대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압둘 멜리크로 대표되는 부하라 반러파의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그 결과 1873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히바에 군사적 연대를 도모할만한 무슬림 칸국은 더 이상 없었다. 이에 히바 칸국은 역내가 아닌 역외 국가인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 시도했다. 영국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사투를 벌이던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1872년 영국은 히바의 동맹 제의를 거절했다. 히바와 비교해 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더 주효했다. 이미 1869년부터 1873년까지 러시아는 영국과 여러 차례 외교적으로 접촉했다. 양국 협의의 출발은 중앙아시아에서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공통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러시아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중립지대화하여 합의점을 도출했고, 그 결과 러·영 협정이 탄생했다. 이 협정으로 러시아제국은 영국의 묵인 아래 히바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확보했다. 결론적으로 1873년 전쟁의 사전준비에 있어 러시아의 대히바 외교는 히바의 대러 외교력을 압도했다. 양국 외교 관계의 최종적인 결말은 1873년 제3차 히바-러시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됐고, 히바는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러시아군이 주도한 강화협상과 전후처리 과정을 통해 히바의 모든 노예가 해방됐고, 노예제도가 영구적으로 폐지됐다. 시르다리야강 남단에서 아무다리야강 북단에 이르는 히바의 많은 영토가 러시아에 할양됐다. 양국 사이에 체결된 간데먄 조약으로 히바와 러시아 사이에 존재했던 장기간의 난제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실 1873년 전쟁의 원인은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했다. 무엇보다도 국경침입과 노예 문제로 대변되는 히바의 전통적인 정책에 대한 고수가 도화선이 됐다. 이는 히바가 러시아에 대한 양면적인 인식을 고수한 것에서 비롯됐다. 칸을 비롯한 히바인들은 과거의 시각과 이미지에 집착했고 이로 인해 그들은 1873년의 전쟁으로 많은 권리를 상실했다. 1860년대에 고르차코프가 기대했던 것처럼 러시아는 결국 히바를 (러시아의 의도대로) 문명적으로 교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가 생각하기에 노예 문제나 국경침입은 문명국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제3차 히바-러시아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해 형성된 히바의 이율배반적 인식과 이미지도 단일하게 조정됐다. 이러한 결과는 러시아제국이 그토록 원했던 문명적 교화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53377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8002
Appears in Collections: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S](국제학대학원) > RUSSIAN STUDIES(러시아학과) > Theses (Ph.D.)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