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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김용중의 선전 독립운동 연구

Title
재미 한인 김용중의 선전 독립운동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Korean-American Yong-jung Kim's propaganda independence movement
Author
오재원
Alternative Author(s)
Oh, Jae-Won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20-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고는 김용중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김용중의 독립운동은 한인 단체, 한국사정사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과 자치능력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 사정사 설립과 『한국의 소리』발행은 세계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던 워싱 턴에서 수행되었다는 점, 독립 이후 김용중의 애국적 활동들에 대한 방향성을 결정 지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는 김용중의 독립운동을 1943년 한국사정사 설립을 기준으로 전후로 나누어 각 시기 활동의 차이를 드러내고 특히 한국사정사 설립 당시 김용중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살펴볼 것이다.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김용중은 사업적 성공을 이뤄냈고 미주 한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 그리고 혈연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 가능했다. 학력과 영어실력은 김용중에게 대외선전을 위한 최선의 자격을 제공해주었고, 북미 국민회와 리들리 그룹은 생존의 근거와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그를 운 동가로 만들어 주었다. 더 나아가 미주 지역 한인 연합 단체에서의 활동은 젊은 나 이에 김용중을 한인의 대표적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시기 북미 국민회, 연합회 에서 김용중의 활동은 한인 사회의 요구를 미주 지역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한인의 자리를 마련하고 현재 한인을 이끌고 있는 임정을 승인하 여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인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이다. 한편 한인 단체 활동 중단과 한국사정사 설립은 김용중의 이력에 있어서 돌발적 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진 배경을 소비하는 일 이 되었고 미주 사회에서 김용중을 고립시켰다. 본고는 한국사정사 설립에 있어 김 용중이 가진 고민의 가장 큰 배경에 전문적인 선전활동의 절실함이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당시 일제가 펼치던 파상적인 선전활동은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 들었고, 이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다고 해도 독립적으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에 김용중은 자비로 한국사정사를 설립하고 『한국의 소리』를 발행하여 한국의 처지와 역사, 문화를 적극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따 라서 『한국의 소리』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선전을 위해 발 행한 자료를 민족적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것이다. 한국이 일제의 선전과는 다르게 어떤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따라서 일제의 통치가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그리고 김용중은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 화를 소개하여 한국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치를 함에 마땅한 민족이라는 것 을 증명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용중은 독립 이후 친외세적인 사람을 국가 경 영에서 배제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임정을 비판한 것으로, 여기에는 미국에서 경험한 임정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국사정사 시기 김용중의 선전활동이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다른 선전활동과 다 른 점은 대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선전활동들이 주로 행정부와 정보기관 의 고위급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김용중은 여기에 더해 일반 대중을 목표로 삼아 선전활동을 진행했다. 발행 부수나 구독자들을 살펴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여론의 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김용중은 여론전 을 바탕으로 한국에 유리한 정책이 결정되도록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다. 종합하자면, 김용중은 소위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구한말부터의 민족적 과제를 김용중 나름의 ‘선전’으로 성취하려 하고 있다. 독립과 독립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은 김용중 및 당대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던 ‘자주’와 ‘근대’국가의 모습이었다. 김용중의 이런 노력은 해방 이후에도 민족의 통일과 민주 화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통일’, ‘민주화’ 역시 김용중이 생각하는 자주적 근대 국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국과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김용중이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선택한 활동 방식은 선전이었고, 여기에 자신의 공적인 생애와 재산 전부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세계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던 워싱턴에서 개인이 진행했다는 것은 김용중이 가진 민족주의의 깊이를 보여준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53033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8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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