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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혼춘사건(琿春事件)’과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 재검토

Title
1920년 ‘혼춘사건(琿春事件)’과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 재검토
Other Titles
The Review of the 'Hunchun Incident’ and the ‘Kando’ Intervention of Japanese Army in 1920
Author
장성규
Alternative Author(s)
Chang, Sung-Kyu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20-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고는 일제가 1920년 간도출병(間島出兵)을 실행하기 위해 마적을 사주하여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일으켰다는 통설의 관점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혼춘사건과 간도출병의 역사적 경위를 밝히는 것을 시도한 연구이다. 지금까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는 1920년 일제가 간도출병을 철저히 계획하여 실행하였고 혼춘사건은 작전 실행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제가 친일 마적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이른바 ‘혼춘사건 사주설’의 관점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상기의 관점은 충분한 검증 없이 일부의 자료만을 근거로 삼은 학설이기 때문에 다시 검토해봐야 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에 본고는 충분한 사료 비판과 검증을 통하여 해당 관점을 비판하고, 혼춘사건과 간도출병 결정 과정을 규명하여 혼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출병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래로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은 간도의 무장 항일단체들이 러시아 적위파와 합세하여 간도 및 조선에 적화사상을 퍼뜨리거나 1920년 4월 ‘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ск) 사건’에서와 같은 사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1919년에 ‘대불령선인작전에 관한 훈령(對不逞鮮人作戰ニ関スル訓令)’을 발표하여 일본군을 간도로 출동시키는 계획을 세워두는 한편 중국과 교섭하여 항일부대를 탄압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일본은 당시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을 비롯한 동북지방 중국관헌들에 대한 교섭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여 그들에게 항일부대에 대한 수사와 토벌을 강요하고 중일협동수사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안직전쟁(安直戰爭) 이후 직예군벌(直隸軍閥)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던 장작림은 일본의 후원을 받기 위해 일본에 최대한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 왔고, 결국 중국 중앙정부를 기만하고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묵인해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장작림과의 타협에 힘입어 조선군은 간도출병 작전의 근간인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간도출병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나갔다. 하지만 시베리아 출병의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떨치고 싶어 했던 일본 정부와 외무성은 중국과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출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작림과의 교섭으로 일본군 간도 침입에 대한 묵인이 이루어졌음에도 조선군은 간도 침공 작전을 실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 측의 토벌대가 일본을 기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조선총독부와 각 영사관에서 일본군 출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간도 출동은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20년 9월과 10월에 1차 혼춘사건과 2차 혼춘사건이 발발하였다. 본고는 당시의 중국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혼춘사건이 일제가 마적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적 습격 사건과 다름없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1920년 당시 중국에서는 군벌 간의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만주지방은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혼란에 빠져있었고, 그것은 만주지방의 안보의 공백을 가져왔다. 혼춘사건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무수한 마적 습격 사건 중 하나였다. 마적 만순(萬順)과 전동(戰東)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들의 혼춘 습격 목적은 약탈품과 인질을 획득하는 한편 도시를 파괴하고 일대에 재난을 일으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군의 교섭을 이끌어내어 최종적으로 관군에 귀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보인 모습은 1920년대 초 중국 전역에서 나타난 ‘병비(兵匪)’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한편 2차 혼춘사건으로 일본영사분관이 분소(焚燒)되고 다수의 일본관헌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거기에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개입되었다는 정보는 일본군에게 있어 간도 출동 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유리한 정보였다. 조선군은 이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혼춘사건을 ‘제2의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선전하여 일본 조야에 위기감을 부추겼고, 그 결과 일본 정부의 전격적인 출병 승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군은 1919년부터 계획해왔던 간도 침공 계획을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한편 항일부대를 빨치산으로 규정한 일본군이 취한 행동은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났다. 경신참변은 간도출병 계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혼춘사건은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그들의 출병의 명분으로 거류민의 보호를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거류민 보호의 의무와 구출, 구제의 의무를 방기하고 항일부대의 초토와 한인사회의 공격에만 몰두하였다. 그들이 간도에서 벌인 행동은 연해주에서 자행된 4월참변의 만행을 간도에서 되풀이한 것과 다름없었다. 간도출병과 경신참변은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당시 일본이 갖고 있었던 위기의식과 중국의 정치적 혼돈을 이용하여 일으킨 참변이었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53031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7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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