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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황해도 재령의 청년운동

Title
1920년대 황해도 재령의 청년운동
Other Titles
The Youth Movement in Jaeryong, Hwanghae Province, in the 1920s
Author
이수연
Alternative Author(s)
Lee, Soo-Yeon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20-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1920년대 황해도 재령의 청년운동의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1920년대 황해도 청년운동의 중심지가 재령이었음을 밝혔으며, 재령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의 이력과 청년회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1920년대 재령의 청년운동이 전체 청년운동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재령은 비옥한 토지를 가진 황해도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들은 상업회사와 운수창고 회사를 다수 설립하였다. 상업회사와 운수창고 회사는 1920년대 초반 재령청년회 임원이 설립·참여하였다. 재령은 조선인이 읍내 상권을 장악한 상업지로 당시 ‘제2의 개성’이라고 불렸다. 사회적으로는 재령은 종교와 서북학회를 통한 활발한 교육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19년에는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서북학회는 재령에 지회를 설치하였고, 황해도 내에 가장 많은 지교(支校)를 두었다.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재령에 많은 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근대교육을 받은 졸업생이 지역사회에 다수 배출되었다. 이들은 재령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1920년대 재령에서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청년회가 황해도에서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재령은 황해도 청년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재령청년회는 재령의 다른 청년회에도 영향을 끼치며 재령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 재령청년회의 주도층은 과거 향리 집안의 청년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1925년 청년회가 ‘혁신’되기 이전까지 적극적으로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지역사회로 유입됨에 따라 각 지의 청년회는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사회주의 계열로 ‘혁신’된 재령의 청년단체들은 재령청년연맹(1926)을 조직하였으며, 황해도청년연맹 결성(1927)을 주도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재령청련은 재령청년동맹으로 단체를 혁신하였다. 재령청맹이 결성된 이후 신간회 재령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25년 재령의 청년단체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은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였으며, 재령 야체이카와 황해도 야체이카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재령의 청년운동을 추동해가는 주요 인물들이 1928년 조선공산당·고려공청 사건으로 대거 체포되면서 재령의 청년운동은 중단되었다. 1920년대 재령의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청년들의 부재는 재령의 청년운동이 다른 부문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왔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53030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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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HISTORY(사학과) > These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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