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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L. R.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 연구

Title
C. L. R.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f 'Creole Marxism' in C. L. R. James: Creolizing Marxism and Postcolonial Subjectification
Author
하영준
Alternative Author(s)
Ha, YoungJun
Advisor(s)
임지현
Issue Date
2009-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C. L. R. 제임스는 맑스주의의 재구성을 통해서 (식민지) 근대성과 주체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고자 했으며, 서구와 비서구의 다양한 공동체들과 소통하고자 시도했다. 따라서 이 연구는 ‘크레올 맑스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고, 제임스의 사상이 지닌 일관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제임스가 ‘맑스주의를 크레올화’했다고 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맑스주의의 탈식민주의적인 전유이다. 제임스는 맑스주의의 재구성을 통해서 이것이 지닌 서구 중심주의적인 성격, 특히 역사발전 단계론과 근대의 유럽 기원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제임스의 시도는 제국과 식민의 이분법을 해체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가 제임스의 사상을 ‘크레올 맑스주의’라고 부를 때 강조하고자 하는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제임스가 다른 이론과의 결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맑스주의를 끊임없이 ‘지역화’하는 것을 통해서 맑스주의의 재구성을 성취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제임스가 추구했던 맑스주의의 ‘성취된 토착성’은 식민지뿐만 아니라, 제국에서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령 서인도 식민지뿐만 아니라, 미국 남부의 흑인 공동체 같은 제국의 내부 식민지에서도 맑스주의를 지역화하고 토착화하고자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가 강조하고자 하는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가 지닌 세 번째 중요한 특징은 ‘정통 맑스주의’나 ‘블랙 맑스주의’ 같은 용어가 함축하게 되는 기원의 순수성이나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관념으로부터 단절했다는 점이다. 제임스는 특정 정체성을 특권화하고 본질화하기 보다는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저항을 조직하는 중심적 요소들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임스가 추구했던 맑스주의의 ‘지역화’와 ‘토착화’는 그가 본질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것은 제임스의 사상에 어떤 긴장을 낳았다. 제임스가 맑스주의를 크레올화했던 방식은 그의 크레올적인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크레올적인 정체성은 대서양 노예제가 번창했던 시절 자신의 살던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뿌리 뽑힌 채,’ 신세계에 ‘재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아프리카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각지로부터 끌려 온 카리브의 흑인 노예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수단, 즉 공유하는 과거의 전통이나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들이 ‘재정착’을 위해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식민지의 지배 문화였던 서구문화였다. 이들은 서구 문화의 전유를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표현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영국령 서인도 흑인들의 ‘생존의 문화’ 즉, 새로운 정착을 위해서 식민지 체제에 의해서 강요된 서구문화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은 제임스에게도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식민지 흑인 지식인이었던 제임스는 ‘영국이 모든 계몽의 원천’이라는 인식에 기초해서 제국을 ‘찬양하고, 경탄하고, 모방하고, 배우는 것’을 강조했던 식민 교육의 산물이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크레올적인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을 ‘반란의 씨앗을 품은 빅토리아인’이라고 묘사했다. 제임스는 나이폴이 영국령 서인도의 식민지 지식인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구 문화의 크레올화는 식민지인이 단순히 서구 문화를 모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게 되는 과정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잔혹한 플랜테이션 노예제, 그리고 인종적, 식민지적 억압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던 서구 문화의 수용은 ‘논전의 과정’이었다. 서구문화의 크레올화는 제국과 식민의 이분법에 근거해서 고정되고 안정된 정체성을 옹호했던 식민 지배 담론에 대한 도전이었다. 마찬가지로 제임스는 크레올화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서구의 식민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로 삼았다.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는 정통 맑스주의가 내재했던 서구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식민지뿐만 아니라 제국을 변혁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수단을 제공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제임스가 맑스주의를 크레올화했던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맑스주의를 다른 이론과 혼성화하는 방식이었다. 제임스는 헤겔과 하이데거를 통해서 정통 맑스주의를 변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변용의 방식은 몇몇 제임스 연구자들이 그의 사상을 ‘헤겔주의적 맑스주의’ 또는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의 한 조류로 간주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제임스의 크레올한 정체성이 맑스주의의 탈 서구중심주의적 변용에 미친 영향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제임스가 맑스주의를 크레올화했던 방식의 다른 하나는 보다 중요한 것으로, 맑스주의를 ‘지역화’하고 ‘토착화’하는 것이었다. 제임스에게 이것은 우선, 특정 공동체의 경험과 저항을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맑스주의를 변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변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제임스가 1940년대에 미국 디트로이트의 노동자들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을 반영해서 맑스주의를 자율주의적으로 재구성한 사례였다. 그리고 제임스가 맑스주의를 지역화하고 토착화했던 두 번째 방식은 개별 사회의 지배 문화나 담론을 서벌턴적으로 전유하는 형태를 취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서구 담론인 맑스주의를 탈식민주의적으로 전유할 수 있었듯이, (식민지) 민중이 식민지 지배 담론을 저항을 위한 수단으로 전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임스는 이러한 민중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서 인간이 사회와 문화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 행위자’임을 강조했다. 제임스가 수행했던 맑스주의의의 크레올화는 ‘이중의 크레올화’ 과정이었다. 식민주의의 시기에 제국과 식민지 문화의 만남은 일방적인 문화적 흐름, 즉 제국의 문화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문화적 동질화나 획일화 과정이 아니었다. 카리브의 식민지 문화는 자신이 선택하고 해석한 제국 문화를 전유하여 크레올 문화를 창출했으며, 역으로 제국 문화를 크레올화시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제임스가 추구했던 맑스주의의 크레올화는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맑스주의를 전유했던 과정이지만, 역으로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는 제국의 정통 맑스주의와 서구 맑스주의를 크레올화했다. 영국 맑스주의의 ‘아래로부터의’ 역사학이나 유럽의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는 제임스의 사상적 영향을 깊게 받았다.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가 보여주는 이러한 ’이중의 크레올화‘ 과정은 제국과 식민지의 문화가 고정되고 경계가 뚜렷한 각각의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임스의 ‘크레올 맑스주의’에는 어떤 이론적 긴장이 존재했다. 제임스는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삶 속에서 ‘크레올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고 불릴 수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원래 유럽 철학의 중심적 개념인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지역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흑인 지식인이었던 제임스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지향했지만, 그 개념을 크레올화했다. 다시 말해서 제임스의 ‘보편적 휴머니즘’은 인종주의와 식민지 착취에 대한 적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크레올 코즈모폴리터니즘’과 함께 영국과 미국의 이주와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공동체들과의 접촉할 수 있었던 경험은 제임스가 저항적 민족주의나 ‘흑인됨’에 대한 강조가 지닌 한계 또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 지배 담론뿐만 아니라 식민지 저항 담론에 내재하고 있었던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역화과 토착화에 대한 제임스의 관심은 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태도, 특히 전후 탈식민주의의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그가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론적 긴장을 비본질주의적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제임스는 사상의 지역화와 토착화를 성취하지 못했고, 비본질주의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도 없었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43985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1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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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HISTORY(사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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