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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dvisor김용헌-
dc.contributor.author송종관-
dc.date.accessioned2020-04-01T16:31:21Z-
dc.date.available2020-04-01T16:31:21Z-
dc.date.issued2010-02-
dc.identifier.uri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41965-
dc.identifier.uri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14187en_US
dc.description.abstract의 ‘寫字時甚敬’이라는 말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程朱性理學의 敬의 서예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 정주성리학이 정착되면서 敬의 서예관이 조선의 학자들에게 서예의 기본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고,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는 春秋大義論이 강조되면서 直의 서예관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 두 서예관은 기본적으로 서품에 대한 평가와 인품에 대한 평가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직의 서예관에서 중요한 것은 節義의 문제였다. 이 두 서예관이 확고해짐에 따라 송설체의 姸媚之態와 조맹부의 失節은 송설체를 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그 결과 송설체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어 조선중기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송설체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인 평가는 유가 도덕관적 관점으로 과도하게 치우친 측면이 있다. 특히 절의라는 성리학적 가치가 강조됨에 따라 조맹부의 내면세계와 그 글씨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맹부의 예술정신에 대한 본질적 이해는 그가 淸心을 근원으로 삼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조맹부가 추구한 예술정신은 일종의 맑은 마음이었다. 조맹부는 맑은 마음을 이상으로 삼아 이를 서예에 깃들게 하려고 노력했고, 세속을 초월하려는 정감을 그의 아름다운 예술세계에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송설체는 이와 같이 맑음을 추구하는 예술관에 ‘貴有古意’가 자리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敬한 자세로 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유가 도덕관적 서예미학사상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의 예술정신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물론 의리의 관점에서 그의 실절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한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관점에 열려 있어야 한다. 허형은 失節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학문은 ‘聖人의 學文’ 그 자체란 찬사를 받았다. 왕탁 역시 실절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학문과 서예로 ‘神筆王鐸’이란 칭호를 얻었다. 조맹부는 실절은 했지만 宋朝의 학문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공로가 있다. 특히 특유의 송설체를 만들어 내 후대의 한 · 중 세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조맹부를 ‘道筆松雪’이라고 새롭게 자리매김 해볼 만하다.-
dc.description.abstract국문요지 趙孟&#38955-
dc.description.abstract(松雪道人, 1254~1322)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 송설체가 도입된 것은 주자성리학 도입과 연관이 있다. 麗末 사대부들이 元으로부터 주자성리학을 수용한 것은 이전과 다른 사상적 풍토를 형성하고자 함은 물론이고, 새로운 정치체계와 사회질서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식에서였다. 조맹부는 宋의 후예이면서 동시에 元朝에 출사했지만 宋朝의 문화예술의 복고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그의 송설체는 원대 학술과 문화가 반영된 결과물일 뿐만 아니라 송에서 비롯된 정통 문화의 계승이자 창안이라 평가 할 수 있다. 고려 사대부들 역시 송설체가 단순히 원의 학술 문화라기보다는 송의 문화, 다시 말해 중화 문화의 표본이자 계승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송설체는 주자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 들어서도 커다란 논란 없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흥성할 수 있었다. 송설체의 흥성과 관련하여 더욱 주목되는 점은 조선 전기에 정치사회의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이제현 - 이색 - 권근으로 이어지는 학통에 기반을 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전기에 관학파의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졌다는 것은 송설체가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송설체는 지식인층과 관아를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서체로 확산되었다. 더욱이 송설체의 미학적 품격과 왕가에서 의도한 조선의 정치적 이상이 결부되면서 송설체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安平大君을 비롯해 송설체에 대한 왕실의 관심은 더욱 깊어졌고, 이러한 관심은 일반 사대부들에게도 확산되어 徐居正을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송설체를 애호하였다. 그 결과 송설체가 모든 공식문서의 대표적 서체로 자리 잡는 등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세종조의 &#65378-
dc.description.abstract훈민정음&#65379-
dc.description.abstract과 &#65378-
dc.description.abstract三綱行實圖&#65379-
dc.description.abstract가 모두 송설체를 자본으로 하였고, 나아가 문종 2년에 주조된 銅製活字도 송설체를 꽃피운 안평대군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만들어졌던 사실로 입증된다. 여말선초이래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며 확산되었던 송설체는 16세기 들어 위 · 진 고법의 관심이 고조되자 상대적으로 위상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이황과 송시열이 조맹부의 서품과 의리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더욱 확산되었다. 이황은 敬의 사상을 바탕으로 송설체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했으며, 송시열은 直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맹부의 失絶을 비판하였다. 물론 이러한 서예 비평은 멀게는 ‘書는 心畵’라는 揚雄의 서예관을 계승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는 程&#38948-
dc.publisher한양대학교-
dc.title趙孟&#38955-
dc.title의 松雪體와 한국 서예에 관한 연구-
dc.title.alternativeThe Study on the Jo, Maeng-bu's趙孟&#38955-
dc.title.alternativeSongseolche松雪體 and Korean Calligraphy-
dc.typeTheses-
dc.contributor.googleauthor송종관-
dc.sector.campusS-
dc.sector.daehak대학원-
dc.sector.department철학과-
dc.description.degreeDoctor-
dc.contributor.affiliation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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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PHILOSOPHY(철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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