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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dvisor박찬승-
dc.contributor.author최은진-
dc.date.accessioned2020-03-27T17:02:10Z-
dc.date.available2020-03-27T17:02:10Z-
dc.date.issued2010-08-
dc.identifier.uri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41505-
dc.identifier.uri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14905en_US
dc.description.abstract본 연구는 1899년 군산 개항 이후 1910년대까지 군산미의 대일 수출구조를 분석하며, 주로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 거래방식과 조선 내 일본인 미곡 수출상 및 일본 내 미곡 수입상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러일전쟁 이후 군산항의 배후지인 전북과 충남 지역에는 미곡 생산을 위해 일본인들이 대규모의 농장들을 다수 개설하였고, 상업자본 또는 고리대금 및 금융자본을 통해 성장한 ‘회사형 지주’들을 중심으로 일본 대자본이 개입하였다. 한편 개항으로 군산미의 수출은 급격히 증가하여 러일전쟁 후까지 그 급격한 증가세는 유지되었다. 병합 후 1910년대 말까지는 군산미의 수출량이 큰 폭의 증가 없이 일정하여, 조선미 수출에서 군산미가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대 말 기준 약 24% 정도였다. 군산미의 대일 수출 규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일본미가의 변동이었다. 일본미가는 1890년대부터 일본 내 쌀 부족으로 계속 상승하였고, 대일 수출이 늘어나며 군산미가도 이에 근접하여 동반 상승하였다. 청일전쟁 이전 미곡 수집을 위해 일본인 무역상은 조선인 객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차 조선인 객주는 배제되었고, 일본인 상인은 직접 내륙지방을 행상하여 미곡을 수집하거나 지주 또는 농민에게 자금을 선대하여 미곡을 매입하였다. 러일전쟁 후 통감부기에는 일본인의 내륙 定住 商業의 발달, 일본 기선의 자유 항행, 철도 운송의 본격화에 따라 일본인 미곡상의 상권 지배력도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군산미를 수집하던 일본인 미곡상들 가운데에는 大商人資本으로 대량의 미곡을 거래했던 경우가 유력하였다. 군산미의 대일 수출을 위해 미곡 수출상은 대개 일본 항구에 있는 미곡 수입상에게 군산미 판매를 위탁하였다. 따라서 미곡 수출 거래상의 주도권은 국내의 미곡 수출상보다 일본의 미곡 수입상에게 있었다. 미곡검사소를 통과한 군산미는 그 품질이 규격화ㆍ표준화됨으로써 수출은 더욱 촉진될 수 있었다. 군산미의 수출은 1901년 대일 직통항로 개시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개항 후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군산의 대일 항운은 大阪商船(株), 日本郵船(株)과 여러 소규모의 일본인 회사들이 담당하였으나, 병합 후에는 일본 정부의 보조로 大阪商船(株)이 거의 독점하였다. 군산미는 大阪, 神戶, 東京 등 일본 대도시로 수출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미 수입상은 조선의 미곡 수출상으로부터 위탁받은 미곡을 일본 미곡거래소에 상장하여 수입거래를 성사시키고, 이후 다른 중매상에게 미곡 판매를 위임하였다. 하지만 大阪의 三井物産會社, 神戶의 湯淺商會, 鈴木商店, 阿部商店 같은 대자본의 무역회사들은 일본과 조선 각지에 지점을 두고 조선미 수출부터 수입 및 판매까지를 담당하였다. 大阪의 藤本合資會社처럼 직접 조선에서 미곡 생산부터 수집 및 수출, 일본에서 수입거래와 판매까지 전 과정을 아울러 경영하는 대규모 회사도 있었다. 이러한 재벌급 회사들은 일본의 미가를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강하였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을 指定商으로 세워 보조금으로 조선미를 대량 수입하게 하였다. 시기별로 제1기(1899-1905년)에는 군산미의 대일 수출구조가 형성되었다. 대일 항로가 개시되어 직수출이 가능해졌고, 일본인 미곡 무역상들은 직접 군산미의 수집에 나섰으며, 수출용 미곡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제2기(1906-1909년)인 러일전쟁 후 군산미의 대일 수출구조는 실질적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인 대상인자본은 미곡 유통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군산 배후지에서 농장 경영을 본격화하여 미곡 생산에까지 진출하였다. 제3기(1910-1919년)인 한일병합 후 군산미의 대일 수출구조는 확장되었다. 호남철도 완공으로 군산미의 비중은 커졌고, 일본 정부 보조로 조선미를 대량 수입하던 일본 대자본의 영향력도 강화되었다.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1890년대부터 쌀 부족 문제가 심화되어 미가가 계속 상승하였다. 그 해결을 위해 일본은 여타의 외국미보다 代用米로서 조선미 수입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군산미의 대일 수출도 점차 증가하면서, 군산미가는 일본미가에 연동하여 동반 상승하였다. 둘째, 군산미의 대일 수출량은 일본 내 군산미 소비 규모에 따라서만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재벌급의 미곡 수입상들에 의해서도 좌우되었다. 일본 정부가 大阪ㆍ神戶ㆍ東京 등 일본 대도시 내 대자본의 미곡 수입상들을 지원하면서 이들은 일본미가 전체를 좌우할 수 있었다. 셋째, 三井物産會社를 비롯하여 일본 대자본은 자국에서의 미곡 수입 및 판매에 그치지 않고 직접 조선에 진출하여 조선미의 수출과 수집 모두를 장악해 갔다. 더욱이 藤本合資會社 등 일본 대상인자본은 미곡 생산에까지 종사하였다. 군산항과 배후지는 일본인 ‘회사형 지주’의 농장이 대거 분포하며, 일본 대자본에 의한 미곡 생산, 수집, 수출 지배의 특성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 곳이었다.-
dc.publisher한양대학교-
dc.title群山米의 대일 수출구조-
dc.title.alternativeThe Structure of Exporting Gunsan Rice to Japan-
dc.typeTheses-
dc.contributor.googleauthor최은진-
dc.contributor.alternativeauthorChoi, Eun-jin-
dc.sector.campusS-
dc.sector.daehak대학원-
dc.sector.department사학과-
dc.description.degreeMaster-
dc.contributor.affiliation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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