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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의 무용서사와 상상계 연구

Title
처용무의 무용서사와 상상계 연구
Author
최미연
Advisor(s)
조흥윤
Issue Date
2010-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국문요지 상상계(l'imaginaire)는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는 역사‧ 문학‧ 과학 등의 텍스트들이 인간의 시각이나 생각의 구조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상상의 소산이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이러한 상상계는 인간의 시각이나 생각 구조를 좌우하는 환경, 즉 문화적 텍스트가 가진 컨텍스트(context)들의 연관관계 속에 구조화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무의식적 가치판단에 의해 삶을 선택하고 구성해 나가는데, 이러한 상상계의 시대별 사회문화적 지형의 맨 밑에는 그 민족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이 존재한다. 각 민족의 원형은 오랜 기간 사회구성원들이 채택하여 전승해 온 신화를 분석함으로 알 수 있으며 신화학자들은 문화 속에서 신화를 발견하고 사회문화적 지형을 설명한다. 또한 그 사회의 원형적 상상계는 언어적 텍스트인 신화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음악, 미술, 무용, 조각 등 비언어적인 텍스트들로도 서사화된다. 지금까지 비언어적 텍스트들이 가진 고유한 서사는 언어로서 해석되기 어렵다고 여겨져 왔으나, 이것들 역시 고유한 상상적 맥락에서 비롯된 독립된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춤동작이 가지는 독립된 서사를 ‘무용서사(The epic of dance)’라고 하며 본 고에서는 처용무의 춤동작의 무용서사를 구성해보고자 시도하였다. 처용무는 현재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민족무용 가운데 천이백년이라는 가장 오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춤이다. 처용무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 헌강왕대를 기원으로 하는 배경설화와 함께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처용무는 1인처용무, 쌍처용무, 오방처용무, 말 위에서 추는 처용무, 칼을 들고 추는 처용무 등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용서사가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따른 사회문화적 지형에 따라 다른 서사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용무의 상상계는 처용무의 춤동작 의미를 해석하여 무용서사를 구성하고 그 무용적 맥락을 고려하여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처용무의 춤동작 텍스트 분석은 현행 처용무에 나타나는 춤동작이 동시대의 다른 민족무용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문화인류학의 연구는 현재 존재하는 문화와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과거에 인간과 맺어온 관계의 변화를 연구하고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한다. 또한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현상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어떤 사회문화적 지형속에서 어떤 원형을 담고 이어가고 있는가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현행 처용무는 조선 후기 1848년 헌종 시기 이후로 궁중연회에서 사라졌던 처용무를 1929년 일제시대에 이왕직아악부의 세 분의 악사들이『정재무도홀기』를 보고 재현한 것이다. 이것을 당시의 아악생들이 일제시대와 전쟁을 거치면서도 지켜오다가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제시대 소화(昭和) 4년(1929)년의 처용무 무보가 남아 있어 복원 당시 처용무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현재 처용무와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당시 아악생들이었던 성경린, 이병성의 처용무 무보도 남아 있어 이들 무보들 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서 각 시기의 무용서사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분석된 내용을 먼저 현행 처용무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처용무의 ‘평진’은 느리고 강한 발디딤으로 춤판을 정화하며 ‘천신계의 신이 인간 세상에 하강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전배’와 ‘상배’는 무용수의 입장에서 춤을 시작하면서 사방의 신에게 고하는 것이며 ‘삼진’은 신과 소통하는 동작이다. ‘사방작대무’는 궁중정재에서 채택된 서사로서 ‘왕의 덕을 찬양하고 무병장수를 비는’ 춤동작인데 잡귀를 쫓는 사방의 강력한 진을 형성한다. ‘동서상대·상배, 남북상대·상배무’는 역시 사방신을 향해 춤을 추며 사방신을 찬양하고 예를 갖추며 다섯 명의 오방신격이 서로 함께 어울려 놀자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다시 오방작대로 이동하는 ‘좌선회무, 일렬제행, 오방작대무’는 인간 세상에 ‘조화’와 ‘화해’를 표현하는 춤을 춘다. ‘수양수무 1동작’은 황처용이 흑·청·홍·백 처용과 연이어 대결구도로 춤추는데 생명을 상징하는 천을 사선 위로 뽑아 올리며 서로 ‘대결’하고 ‘화해’하며 ‘기쁨의 춤을 추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양수무 2동작’은 오방신이 신이 나서 흥겹게 놀며 사람들에게 ‘복과 장수를 주는 춤’이다. 마지막으로 ‘낙화유수’ 동작을 통해 ‘악귀를 쫓고 사람들에게 복을 퍼주는 춤’을 추며 춤의 순서를 마감한다. 다음으로 초기의 이왕직아악부의 처용무는 『악학궤범』(정재무도홀기)의 춤동작과 비교하였을 때 ‘무릎디피무, 홍정도돔춤, 인무, 주선, 청백 무진무퇴‧ 홍흑 무진무퇴‧ 환장무‧ 정읍무‧ 환무’ 등은 사라지고 ‘사방작대’와 ‘오방작대’ ‘회선’ 동작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사방작대’와 ‘오방작대’는 궁중정재의 대형을 참고하였으며 『악학궤범』 처용무가 노래와 춤이 함께 연행된 것과 달리 ‘창사’를 부르고 별도로 춤을 추는 형식으로 바뀌어 진행되었으며 춤동작에 있어서도 오방작대에서 ‘기쁨의 춤을 추는’ 부분은 궁중정재 5인무에 영향을 받아 다같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돌아나오는 화려한 동작이 삽입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봉산탈춤에서 취발이가 노장을 쫓는 동작과 같은 ‘낙화유수’ 동작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당시에 처용무에 대해서 잡귀를 쫓는 의미의 서사가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전배‧ 상배’ 는 1929년 재현된 당시에는 없었던 동작이 1930년 무렵 수정된 것으로 궁중정재와 일무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문헌기록상의 조선시대 『악학궤범』 처용무의 춤동작 의미와 무용서사를 구성하였다. 『악학궤범』은 조선 성종 시기의 기록으로 이 시기의 처용무는 궁궐의 나례가 끝나고 밤 늦은 시간에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화려한 의식의 형태로 공연되었다. 본 고에서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처용무가 ‘처용가’를 비롯하여 ‘봉황음‧ 삼진작(정과정곡)‧ 정읍사‧ 북전‧ 영산회상‧ 미타찬‧ 본사찬‧ 관음찬’이 불려지는 가운데 함께 추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노랫가사와 춤동작을 연결시켜 보았다. 또한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춤동작 명칭을 궁중정재의 맥락과 그 밖의 민족무용의 맥락으로 나누어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악학궤범』의 처용무는 ‘신의 모습을 찬양-생명력으로 춤판을 정화-왕의 덕을 송축, 장수를 빔-신과 소통함-역신을 위협하고 쫓아냄-왕을 흠모하며 덕을 찬양함-신과 하나됨-왕을 송축하고 나를 믿어줄 것을 소망함-천신의 하강과 구원의 기쁨, 평안을 기원’의 무용서사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주선(周旋)‧ 환장무(懽 場舞)‧ 환무(歡舞)’는 신과 하나되고 천신의 하강과 구원을 기뻐하는 원형적 무용서사인데 이러한 동작은 현행 처용무의 초기 형태인 일제시대 처용무에는 복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처용무가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로 오면서 왕권이 미약해지면서 제천(祭天)하는 원형적 상상계가 매우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용은 우리 무의 원형적 상상계라고 할 수 있는 천신(天神) 계급의 신령인 사해용신에 대한 신앙과 연관되어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의 천신은 창조주로서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게으른 신’이 아닌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지모신과 결합하여 국가의 시조를 탄생시키는 적극적인 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리 무의 신령은 우리 민족이 제천의식 속에서 천신(天神)을 섬김과 동시에 천자(天子)인 왕을 섬기는 심성으로 이어져 내려왔을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신의 세계와 소통하며 신명을 얻고 깨달음을 얻는 종교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의 신앙이 삼국시대 이후로 외래 종교의 수입으로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질병과 반란 등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점차 위축되었다. 헌강왕 대에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왕이 무적인 신앙을 다시 찾고자 한 것이 처용설화의 신화로서 분출된 것이다. 처용설화는 신라시대에 유행한 불교의 한 풍토로 ‘천신’이 내려와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고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습합되기도 하며 석가세존의 설법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의 서사와 만나 ‘회무(回舞)’의 무용서사를 형성하였다. 이것은『악학궤범』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까지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비록 불교적인 외형을 띄고 있지만 무의 천신(天神)에 관한 원형적 상상계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용신’이자 ‘천신’ 계통의 처용은 시대가 변하면서 ‘소매를 날리며 도는 춤’을 추는 산신·신선’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산신’이 무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신’으로서 ‘천신’계통으로 이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무의 신령개념은 ‘천신’이자 ‘산신’인 ‘시조신’을 중심으로 모든 신령들이 ‘조상신’으로 이해되며, ‘산신’이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칠성신’과 같이 모셔지기도 하고 ‘사해용왕’과 같이 모셔지기도 하는 ‘중층성(中層性)’을 가진다. 또한 무의 의례에는 춤과 노래와 꽃·음식·술 등의 상징들이 참여하며 이승 상상계와 저승 상상계가 태극으로 순환하는 조화를 회복시키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러한 전통의 무의 의례는 고려시대 팔관회에서 궁중의 나례와 연회, 그리고 궁중연회의 중심인 처용무로 이어져 내려온다. 의례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심리적 구조를 반영하고 사회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를 비교해보면 『악학궤범』의 노랫가사인 ‘처용가’와 ‘정과정(鄭瓜亭)·정읍사(井邑詞)’의 악곡은 『정재무도홀기』에서 모두 사라지고 ‘영산회상’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서사가 궁중의례에 사용된 것은 ‘처용가’의 서사가 ‘영산회상’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서사가 신하들의 모함으로 임금에게 버림 받고 귀양을 온 정서(鄭敍)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인 ‘정과정’과 ‘정읍사’와 연결된 춤인 궁중정재 ‘무고(舞鼓)’가 고려 충렬왕 때 시중(侍中) 이곤(李混)이 영해(寧海)로 귀양을 갔던 서사가 연결되며 맞물린 것이다. 이것은 ‘처용가’가 처용이 아내의 간통을 보고도 ‘말 하지 않은(相不語)’ 것이 ‘삼재팔난(三災八難)’을 소멸시키고 역신을 물리칠 만한 행동이었던 것으로 여기고 왕과 신하가 함께 본받음직한 것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무(巫)의 서사 가운데 신을 찬양하고, 잡귀를 쫓고, 복을 주는 것과 함께 신이 인간들에게 말로 인한 재앙인 ‘관재구설수를 막아준다고 약속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무의식 속에 죽음이나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말로 입는 화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처용무의 원형 상상계를 통하여 이를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배경으로 한 집정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조선 후기에 들어 왕권이 더욱 약화되면서 결국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민간으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시대 장악원을 대신하여 이왕직아악부를 통해 조선시대의 궁중아악의 대를 이어갔다. 다시 재현된 처용무는 나라와 왕을 잃은 일제시대라는 참혹한 시대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왕을 감히 높여서 찬양할 수도 없고 일본 총독부의 감시라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아악사들은 궁중아악의 전통을 지켜내었으며 전쟁을 거치는 힘겨운 과정에서도 처용무를 전승하였다. 이제는 처용무가 우리 민족의 원형 상상계를 회복하고 민족의 자존감을 세울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할 때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41473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1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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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CULTURAL ANTHROPOLOGY(문화인류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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