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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경성법학전문학교의 교육과 학생

Title
일제하 경성법학전문학교의 교육과 학생
Other Titles
The Education and Students of Keijo Special School of Law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uthor
김호연
Alternative Author(s)
Kim Ho-yeon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11-0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일제시기 관립전문학교 중 하나인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설립 배경과 교육, 학생들의 학교생활 등을 분석하여 식민지 고등교육사의 일면을 밝히고,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을 통해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담당한 역할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성법학전문학교는 1895년 근대적 사법제도를 운영할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법관양성소에서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로 사법권이 넘어가면서 법학교로 개칭하였다. 법학교는 강제 병합 후인 1911년에 폐지되고 대신 경성전수학교가 설립되었다. 경성전수학교는 1916년에 관립전문학교로 지정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통치 방침을 다소 완화하여 교육에서 조선과 일본 간의 차별을 철폐한다는 미명 아래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수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직원 중 실제로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은 학교장을 비롯하여 교수, 조교수, 촉탁교원, 강사 등이었다. 학교장과 교수는 대부분 법학이나 문학전공자였다. 교수나 조교수는 대체로 재직기간이 짧고 종종 재외연구원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어 교육은 다소 부실하였다. 직원 중 조선인은 극소수로 교육은 거의 일본인의 손에 맡겨졌다. 교과목은 법률과 경제에 관한 과목이 주요 과목이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황국신민화와 관련된 과목이 신설되면서 전체의 2/3가량을 차지한 주요 과목의 비중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입학시험은 신체검사 및 구두시험과 학력시험으로 구성되었고 우수한 학생들을 위한 무시험검정제도도 있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는 다른 관립전문학교와 달리 유일하게 조선인 입학자의 수가 일본인의 수보다 많았다. 이는 조선인 지원자의 수가 일본인 지원자의 수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입학경쟁률에서 보면 일본인의 합격률이 조선인의 경우보다 최소 2배에서 5배가량 높았다. 이는 다른 관립전문학교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즉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조선인 학생이 많은 것은 조선인의 전통적인 문과 선호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학교의 여러 규칙들을 통해 규제되었고 이외에 상벌제도와 시험 등이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이후 학교는 전시국방체제에 맞게 재편되어 학생들은 신체와 복장, 사용하는 언어는 물론 학교 밖 일상생활까지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학생들의 과외활동은 교우회를 통해 이루어져 학생들은 교우회의 각 부서인 정구부, 유도부, 육상부, 축구부, 검도부 등과 회보부, 변론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이후에는 교우회 역시 국방훈련과 근로동원을 위한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의 진로에 대해 살펴보면 우선 일제시기에는 행정관청과 사법관청 등 관공서에 많이 진출하였고 가업의 비중도 높았다. 사법관청에 취직한 졸업생들 중 법관으로 임용된 자는 매우 적었고 대부분은 하급관료인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다수가 판ㆍ검사로 임용되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관양성소와 법학교는 사법관을 양성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그러나 강제 병합 이후에는 설립 목적이 ‘公私의 업무에 종사할 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사법관 양성 기관에서 하위 전문직 종사자 양성 기관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또한 설립 목적에서 처럼 다른 관립전문학교와 비교하여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성향이 강하였다. 이 점은 전통적인 문과 선호 현상과 함께 조선인 학생들이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많이 지원한 요인의 하나였다. 둘째, 교수진의 구성을 보면 교수의 전출이 잦고 그 자리를 임시교원인 촉탁교원이나 강사가 채우는 경우가 많아 실제 교육은 다소 부실하였다. 학생들은 교수 충원과 교과내용의 충실을 총독부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나아진 점은 없었다. 오히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와 관련한 교과가 많이 늘어나면서 전공 교육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전선이 확대되면서 황국신민화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넘어 일상생활에서도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셋째,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일제시기 행정관청과 사법관청 등에 주로 취직하였는데 대부분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 등 하급 관료에 머물렀다. 그러나 해방 이후 고위 사법 관료 자리를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물러나자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사법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외에 정계 및 관계, 실업계에서도 고위 관료 및 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해방 후 한국사회의 각 분야에 다수 진출하였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39988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16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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