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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녀 비형랑>조의 서사구조와 의미 연구

Title
<도화녀 비형랑>조의 서사구조와 의미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narrative structure and meaning in
Author
문아름
Alternative Author(s)
Moon, A Rum
Advisor(s)
이도흠
Issue Date
2012-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논문은 『삼국유사』 「기이」편 <도화녀 비형랑>조의 문학적 구조를 밝히고, 진지왕-진평왕 시대의 사회문화상이 어떻게 굴절되어 설화 속에 반영되고 있는지 확인하여 텍스트의 종합적 의미를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삼국유사』는 고조선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역사적 사건과 불교에 대한 기록, 전설, 민담 등 다양한 자료를 채록하여 구성한 종합 텍스트이다. 그 중 「기이」편은 『삼국유사』 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유일하게 첫머리에 서문을 두었다. 이 서문을 통해 일연은 삼국의 시조를 ‘괴력난신’이 아닌 ‘신이’로 평가하며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기이」편의 ‘신이’는 설화에서 태어났다. 역사 기술에 설화를 끌어들임으로써 탈락되고 윤색된 역사적 진실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기이」편 <도화녀 비형랑>조에 대한 분석은 텍스트의 서사구조를 파악하면서도 설화가 위치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더하여 구성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2장에서는 <도화녀 비형랑>조의 서사를 시퀀스 단위로 분절하여 텍스트의 표층구조를 확인한다. 이 서사의 표면적 구조는 ‘진지왕에 대한 역사적 기록 → 폐위되어 죽은 진지왕이 도화녀를 찾아와 동침하였고 이로 인해 비형이 태어남 → 귀신과 어울려 놀던 비형에게 진평왕이 명을 내려 다리를 만들게 함 → 비형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일하던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비형이 나서서 이를 징치함 → 비형이 귀신 무리와 결별하고 벽사신이 됨’으로 정리된다. 이는 폐위된 임금의 아들 비형이 백성을 수호하는 벽사신이 되기까지 겪게 되는 일종의 과업 성취 과정이다. 주체인 비형은 결핍 단계에서 출발하여 시련으로 이루어진 변형과정을 거쳐 결핍의 충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그레마스의 행동자모형을 서사에 적용해 보면, 비형은 크게 3단계의 시련을 거치면서 역할 변화를 이룬다. 군사들을 따돌리고 밖으로 나가 귀신 무리를 데리고 노는 것을 통해 과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자질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자격 시련’, 귀신 무리의 도움으로 다리를 놓음으로써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권력을 확보하게 되는 ‘결정 시련’, 내부 체제를 배신하고 도망간 길달을 징벌하여 벽사신으로 좌정하게 되는 ‘영광 시련’이 시련의 3단계에 해당한다. 비형은 처음에 귀교를 건설하면서 안과 밖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서사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다시 안팎을 나누고 외부를 배척함으로써 내부 체제를 공고히 하는 문으로 그 역할을 뒤바꾼다. 이는 내부 세력을 결집하여 지배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했던 진평왕의 노력과 동시에 진행된다. 비형과 진평왕 사이에는 이렇게 ‘내부 권력의 확보’와 ‘공고한 지배 권력의 구축’이라는 가치 교환이 일어난다. 길달은 끝내 포섭되지 않았기에 배척되는 타자로 설정되며, 비형의 역할이 서사 전반과 후반에서 뒤바뀌어 나타나는 양상은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3장에서는 <도화녀 비형랑>조가 위치하는 진지왕-진평왕 시기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삼국사기』의 기록과 함께 살핀다. 이 시기에는 진흥왕의 첫째 아들이었던 동륜을 중심으로 한 동륜계와 둘째 아들인 사륜계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대결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다툼으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진평왕에게는 왕실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켜야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그 해결책으로 진평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을 포섭함으로써 동륜계와 사륜계를 결집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용춘 또한 이에 적극적으로 응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신라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이후 무열왕-문무왕-신문왕으로 이어지는 진골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종교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진흥왕-진지왕-진평왕 대는 왕을 전륜성왕에 비견하고, 왕가를 부처의 가계와 동일시하는 등 불교를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이념으로 발전시킨 때이기도 하다. 왕실의 적극적인 불교 수용과 전파는 천신 신앙이나 용 신앙과 같이 신라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토착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결국 불교는 토착 신앙을 흡수하거나 배척하면서 신라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 체계로 자리 잡아 중앙집권체제의 바탕이 된다. <도화녀 비형랑>조는 토착 종교에 대한 포섭과 배척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4장은 『삼국사기』에서 드러나는 반영상과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지는 굴절상을 통합하여 당대의 역사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두 기록은 각각 의식적-무의식적 검열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르게 재현한 것이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은 무열왕계 성립의 기초가 되는 인물이나 전제왕권의 확립과 왕실 정통성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 전면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의도적으로 탈락되었다. 그러나 민중은 진실에 질긴 생명력을 부여하여 그를 비형이라는 인물로 굴절시켜 설화 속에 남겼다. 이렇듯 진지왕-진평왕 대의 역사적 ‘진실’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주체에 의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도화녀 비형랑>조를 통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36299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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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KOREAN LANGUAGE & LITERATURE(국어국문학과) > These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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