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後期 京畿地域 兩班 家門 硏究

Title
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後期 京畿地域 兩班 家門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f Yangban Family, Specifically Chootan Clan of Haejoo Oh Family in Late Chosôn by Researching Gomunseo
Author
장현희
Alternative Author(s)
Jang, Hyun Hee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13-0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국문요지 본 논문은 古文書를 이용하여 朝鮮後期 京畿地域의 兩班 家門의 生活相과 存在 樣態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古文書는 일상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生活史 연구에 적합한 자료이다. 생활사에는 대체로 개인의 일상 및 가정생활, 친족생활, 사회생활, 경제생활 등이 공통적으로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연구는 고문서라는 자료의 한계, 즉 대부분 草書로 이루어진 자료 해독의 어려움과 함께 고문서 자료의 다양성과 산발성으로 인해 일관된 사료 해석의 어려움이 있어 자료 형태에 따라 개별적 연구 소재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경향이 있다. 分財記 연구자는 분재기 중심의 연구를, 訴訟 연구자는 소송 중심의 연구를, 戶籍 연구자는 호적 중심의 연구를, 賣買文記 연구자는 매매문기 중심의 연구 등의 개별적 연구 경향이 강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종합적인 생활사 연구를 목표로 龍仁 海州吳氏 楸灘公派 가문의 家藏 古文書 자료를 토대로 이 가문의 사회생활, 친족생활, 경제생활 등의 구명을 통해 조선후기 경기지역 양반 가문의 종합적인 생활상을 구현함을 목표로 하였다. 아울러 본 논문은 龍仁 海州吳氏 楸灘家門의 종합적인 생활상의 구명을 통해 京畿士族의 存在 樣態의 일환을 밝히고자 한다. 이 가문의 중심을 이루는 楸灘公派 宗孫은 서울에 主居하며 廣州, 竹山, 陽城, 龍仁 등의 近畿地域에 門中의 세거지를 두고, 문중 활동을 통해 서울과 근기지역을 오가며 종손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族勢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경기 사족의 존재 양태는 先祖의 祠堂과 遺物을 지키면서 세거지를 유지하며 宗孫을 중심으로 族的 결속을 강화해 가던 嶺南地域 士族과 대조를 이룬다. 龍仁 海州吳氏 楸灘公派 家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海州吳氏는 高麗 때 軍器監을 지낸 吳仁裕를 始祖로 하는 가문이다. 고려말경 海州에서 竹山, 廣州, 陽城 등지로 이거해와 近畿地域을 중심으로 새로운 파를 형성하며 세거하여 왔다. 그러나 宗孫을 비롯한 현달한 인물들은 주로 서울에 살고 있었다. 이미 조선 중기 吳希文대 이전부터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손들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 주거를 두면서도 경기지역의 세거지인 廣州나 竹山 등지에도 선영과 전답을 마련하여 서울과 경지지역을 오가며 존재해 왔다. 해주오씨와 용인과의 인연은 吳希文이 용인의 名閥인 延安李氏와 혼인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男歸女家婚 및 朝鮮前期의 均分相續의 풍습에 따라 용인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吳希文의 아들 吳允謙대 이후부터 용인에 先塋을 마련하고 田畓과 家舍를 둠으로써 용인에 새로운 세거지를 영위하게 되었다. 용인 해주오씨가 중앙에까지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楸灘公派의 派祖인 吳允謙대 이후부터이다. 오윤겸 이전에 그의 아버지 오희문 및 선조대의 名族들과의 혼인으로 인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고, 이는 오윤겸대에 와서 그의 가문이 흥기하는 바탕이 되었다. 오윤겸은 領議政에까지 오른 인물로, 그의 정치적 부상에는 그의 外家, 즉 당시 李廷龜․李貴로 대표되는 延安李氏와의 戚分 관계가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윤겸은 당시 사림의 주도 문하인 成渾의 門人으로서 학계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윤겸의 영달은 이후 해주오씨 가문이 성장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여, 17세기에만도 많은 文科 합격자와 堂上官 이상의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아들 吳達天이 贈吏曹判書를, 손자 吳道一이 兵曹判書를, 玄孫인 吳命俊이 左參贊을, 吳命恒이 右議政을, 吳命新이 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吳命恒의 경우는 少論으로서 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奮武功臣 1등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吳允謙 후손이 중심이 된 海州吳氏 집안의 정치적 성향은 초기에는 西人이었으며, 이후 老․少論 붕당 후에는 少論으로 활동하였다. 이같이 少論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던 海州吳氏 楸灘公派의 후손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老論주도의 정국이 되는 것에 반비례하여 그들의 활동은 위축되어 갔다. 정계에서의 활동은 위축되어 갔지만 용인 해주오씨 추탄공파 가문은 龍仁 慕賢面 五山里 일대에 先塋을 조성하고 同族部落을 형성하며 족세를 꾸준히 유지하여 용인 내에서 명벌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海州吳氏 楸灘公派 宗家를 통해 본 경기사족의 존재 양태는 住居는 서울에 있으면서 인근의 京畿地域에 門中의 세거지를 두고 문중을 장악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는 것이다. 해주오씨 추탄공파 宗家는 이미 조선중기의 吳希文 이전부터 서울에 살고 있었으며, 이후 19세기 楸灘派祖 吳允謙의 8세손 宗孫인 吳商黙대에 이르러서야 용인으로 내려와 살았다. 이들은 서울에 살면서 廣州, 龍仁 등지의 근기 세거지에서 얻은 수입원으로 서울 생활을 유지하며 아울러 문중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들의 在村 支配는 직접 관리의 형태를 띠었다. 즉 서울 종가의 아버지와 용인 촌가의 아들이 혹은 그 반대로 아들이 서울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촌가에 있으면서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으며 촌락을 지배하고 문중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종가의 재원 마련은 廣州, 龍仁 등지의 전답에서 얻어지는 수입에 있었다. 현전 고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가의 전답분포 지역은 龍仁의 慕賢面 牛鳴洞․古梅谷․山下局內, 蒲谷面 釜谷, 東邊面 御井浦․峨嵯峙, 邑內面 下馬碑, 器谷面 寒宜日과 廣州의 眞海 지역과 廣州 彦州面 土塘里․沙平里․日暮室洞과 五浦面 中洞, 果川 霜草里面 霜草員․杻峴 및 下東面 菊逸里, 上北面, 北面 沙坪里와 楊州 白石面 防築里 上山栗園 등이다. 전답규모는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 초반까지는 160~230餘斗落에 이르는 규모를 보이다가, 19세기 중엽에는 80~130여두락으로 규모가 줄어들고, 19세기 후반에는 40~50여두락으로 규모가 급속히 줄어든다. 이는 秋收記上에 나타난 전답 규모로, 추수기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結卜記에 등재되어 있는 田畓과 정확한 규모가 드러나지 않는 田의 규모를 추산하면 전답의 규모가 추수기상의 규모보다 2~3배 더 컸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경제적 기반의 또 다른 한 축인 奴婢는 吳命久가 戶主로 있을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대략 노비수가 80~90명 정도를 유지하였다가 이후 吳泰榮代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는 50~60여명 정도로 줄어들다가 이후 吳商黙代인 1891년에 가면 奴1, 婢1명만 남는 규모로 줄어든다. 田畓 운영은 畓을 위주로 경영하였으며, 畓 경영은 打作을 위주로, 田 경영은 賭地를 위주로 운영하였다. 地代는 斗落當 打租가 평균 6.7斗, 賭租가 4.3斗로 賭地보다는 打作에서의 地代가 더 높았다. 따라서 畓에서 打作을 위주로 경영하였던 것이다. 田에서의 地代는 斗落當 평균 1.73斗로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전답의 규모의 축소에 따라 곡물 수입도 전답규모의 추이와 마찬가지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는 50~80여석의 규모이고, 19세기 중반에 가면 20~50여석으로 줄어들다가 19세기 후반에 가면 20~30석 규모로 줄어든다. 이렇듯 19세기 후반에 가면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가는 家勢가 급격히 기운다. 이는 개항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지주제가 확대되어 가는 추세였는데, 이 시기 종손들이 이러한 농업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財源을 바탕으로 추탄 종가는 문중 활동을 통해 종중을 장악하고 서울과 용인에서의 해주오씨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가문은 남달리 가계의식과 종족 의식이 강하여 이미 조선 전기인 1401년(태종 1)에 「族圖」를 편찬하였으며, 이는 이후 발간되는 甲戌譜(1634), 戊戌譜(1718), 辛卯譜(1771)의 저본이 되었으며, 이러한 族譜 편찬을 통해 문중의 족적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중심에는 추탄공파 종손이 있었다. 문중이 더욱 조직화 되는 것은 1766년(영조 42)에 성립된 宗禊를 통해서이다. 설립 목적은 친족간의 和睦과 相扶相助 및 孝悌之心과 義理의 고양에 있었다. 종손을 중심으로 한 문중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19세기에 3차에 걸쳐 벌이진 용인 迎日鄭氏와의 山訟이었다. 조선은 초기부터 ‘山林川澤與民共之’를 표방하며 山林의 私占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산림에 묘지를 허용하는 墓地法制의 변천에 따라 차츰 묘지를 둘러싼 산림의 사유화가 진전되었다. 이로 인한 분쟁이 山訟으로 발전하였으며, 산송은 16세기부터 대두되어 17, 18세기를 거치며 꾸준히 증가하다가 19세기에 가면 급격하게 상승하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써 산송의 원인도 다양해졌다. 용인 迎日鄭氏와 海州吳氏 간의 山訟은 1차로 1821년에서 1822년까지, 2차로 1830년에, 3차로 1898년에서 1899년까지 벌어졌다. 용인 迎日鄭氏와 海州吳氏간의 1차 산송과 2차 산송은 墓地를 둘러싸고 일어났으며, 3차 산송은 묘지와 직접 관련이 없이 ‘斫楸埋炭火田’으로 인해 일어났다. 3차에 걸친 산송의 원인은 표면상 禁葬을 들어 산송을 제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산림의 점유를 위한 경제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산송의 배경에는 양 가문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요어 : 고문서, 생활사, 존재양태, 조선후기, 양반, 가문, 문중, 종손, 경기, 용인, 해주오씨, 영일정씨, 추탄공파, 사족, 경제기반, 전답경영, 경제생활, 사회생활, 친족생활, 족도, 족보, 종계, 산송, 소론가문, 노비, 추수기, 소지, 노비안, 토지명문, 호적, 종첩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33737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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