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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지방 물산공진회 연구

Title
1910년대 지방 물산공진회 연구
Author
정윤희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16-0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1910년대 지방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의 ‘목적’과 출품과정, 출품구역, 전시물품, 전시관, 출품물심사 등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민간협찬회 구성과 관람자 동원주체 그리고 전시물품의 구성을 규명하여 지방물산공진회의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서구에서 박람회가 국가적 제전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도 내국권업박람회를 위시하여 ‘박람회 시대’를 열어갔다. 그리고 조선도 박람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 1906년 韓日博覽會를 개최하였다. 이어서 1910년 이후에 慶北物産共進會(1913년), 西鮮物産共進會(1913년), 慶南物産共進會(1914년), 全北物産共進會(1914년), 慶北物産共進會(1918년) 등의 지역단위에서 공진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개최된 지방물산공진회는 ‘조선 산업의 진흥과 장려’에 목적을 두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표방이 아니라 조선에서 ‘경제적 수탈’을 위한 ‘원료공급지’로의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지방물산공진회는 식민지의 ‘발전상’을 조선인들에게 선전하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경성을 비롯하여 근대도시를 관광하게 하는 국내시찰단을 조직하여 ‘근대’를 시각적으로 접하게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공진회가 열리는 지방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여 민간자본으로 식민지 조선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대구에서 제1회 경북물산공진회가 1913년 11월 5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되었고 관람자 수는 133,557명에 이르렀다. 출품점수는 9,737점에 달하며 품목은 농산품, 잠업품, 수산품, 공산품, 원예품, 참고품으로 구분되었다. 심사를 통해서 수상자가 결정되는데 상을 수여한 사람은 2,140명으로 총 인원의 24%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공진회를 계기로 각종 회의와 집회 등이 열렸다. 이어 제2회 경북물산공진회가 1918년 10월 31일부터 11월 19일까지 개최되었는데 관람자가 166,785명에 달하였다. 전시물품은 제1회 경북물산공진회에서 經濟, 審勢, 恩賜授産金의 물품이 추가되어 총 15,676점이 출품되었다. 출품된 물품은 3단계의 심사규정에 의해 심사를 받고 수상자가 결정되는데 수상자는 총 3,651명으로 전체 인원의 28.9%를 차지하였다. 공진회를 기회로 생각하여 각 관청, 학교 단체에서는 각종 회합이 열렸고 그 부속 사업으로 교육품전람회, 미술품전람회 등의 전람회와 백일장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진남포에서는 일본인·조선인 상업회의소, 수산조합, 농회지회가 공동주최가 되어 1913년 11월 2일에서 15일까지 서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14일의 개회기 동안 40,841명이 관람하였고, 출품점수는 농산물, 수산물, 공산물, 참고품을 합하여 6,893점이 출품되었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중에 협찬회에서는 각종 대회 및 여흥을 준비하였는데 특히 씨름과 기생들의 각종 여흥은 관람객의 이목을 끌었다. 부산에서 경남물산공진회가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되었고 총 257,260명이 관람하였다. 농산품, 원예품, 잠업품, 공산품, 음식품, 수산품, 참고품으로 구분되어 총14,300점이 출품되었다. 그리고 공진회를 계기로 교육품전람회, 백일장대회 등의 집회와 씨름대회, 漁船競爭, 해녀잠수경쟁 등의 각종 오락 행사가 개최되었다. 전주에서는 1914년 11월 17일부터 30일까지 2주간 전북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는데 출품점수가 농임산품, 원예품, 산업품, 수산품, 공산품을 합하여 5,922점이며 관람자는 전체 132,949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진회를 계기로 불완전하였던 여관을 개량하여 증설하였고 전주-이리 경편철도도 개통하였다. 지방물산공진회는 주로 ‘道’가 주체가 되어 개최되었지만 민간협찬회의 후원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협찬회는 공진회 사업을 후원할 뿐 아니라 관람자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협찬회는 대개 그 지방의 자산가나 유지 또는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공진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 중 하나는 관람객의 수이다. 따라서 주최측은 관람객의 유치와 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각종 조직을 이용하였다. 앞서 언급한 민간협찬회가 관람자를 적극 유치하였고, 『每日申報』와 같은 신문도 홍보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지방행정조직도 단체관람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지방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전시물은 대체로 농산품, 잠업품, 수산품, 공산품, 원예품, 참고품을 나눌 수 있다. 주로 1차 산업품 중심이며 그 중에서도 농산품의 비중이 과반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농업 중심의 산업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 조선을 식량, 원료의 공급지이자 상품판매 시장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27174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27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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