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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기 泗川城 전투 재검토

Title
정유재란기 泗川城 전투 재검토
Other Titles
The Reexamination about the Battle of Sachŏn Japanese Castle
Author
문형준
Alternative Author(s)
Moon, Hyung-Joon
Advisor(s)
이석규
Issue Date
2020-0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8년에 벌어졌던 사로병진 작전의 실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천성 전투를 재검토해서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전투의 배경과 전개를 재구성하고, 패전의 원인과 영향을 구체적으로 규명하여 참전국들의 실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정유재란 초기의 일본군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에 나선 조명연합군은 울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양호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사로병진 작전을 입안했고, 사천이 울산·순천과 함께 작전목표로 선정되었다.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1597년 이곳을 요새화했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5천명의 병력이 오늘날의 선진리왜성인 사천왜성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1598년 9월 동일원과 정기룡이 이끄는 2만 9천의 조명연합군은 진격을 개시했고, 지성들을 함락하며 사천왜성에 육박했다. 이때 고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동일원은 이를 거절하고 사천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조명연합군이 기세를 올렸지만 화약폭발사고로 인해 진영에 혼란이 발생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일본군의 역습에 명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주하게 되었다. 비록 화약폭발 사고가 패전의 결정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단순히 지휘관의 방심으로 패전했다고 하기에는 조명연합군에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철저히 요새화된 왜성을 공격하기에는 조명연합군의 전력은 충분하지 않았으며, 보급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혼합군으로 구성된 명군의 결속력은 약했으며, 북병으로 구성된 기병은 공성전에 적합한 병종이 아니었다. 반면 일본군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노련하게 조명연합군을 상대했다. 사천성 전투의 패전 후 명군의 전투의지는 사라졌다.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에게 철군 명령이 내려졌고, 여기서 명과 일본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적극적인 강화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사천성 전투는 정유재란 막바지에 명의 입장을 바꾼, 벽제관 전투 못지않게 결정적 전투였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23433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37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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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HISTORY(사학과) > These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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