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州 新羅城의 考古學的 特徵

Title
漢州 新羅城의 考古學的 特徵
Other Titles
Archaeological Characters of Silla Fortresses in The Han-ju
Author
이상현
Advisor(s)
배기동
Issue Date
2017-08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국 문 요 지 성곽은 다른 유적과 달리 당시의 군사·정치·사회·경제 등 제 분야의 종합적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 특히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고대에는 성곽의 기능과 역할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판가를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성곽에 대한 연구는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곽 연구는 대부분 개별 성곽의 축조기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축조주체와 사용시기를 밝히는데 주력했고, 주로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성곽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지방행정체제연구에 성곽은 대단히 제한적으로 활용되어 왔는데 주로 성곽의 규모(총둘레)를 기준으로 소위 지역거점성곽을 비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곽의 기능변화 및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하여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축성시 소요되는 인적 그리고 물적자원에 대한 검토와 사용시기 및 행정치소의 특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본고에서는 한주의 신라성곽이 새롭게 확보한 영토를 수호·관할하는 일환으로서 축성계획단계에서부터 특정한 목적과 활용계획에 의해 축조되었음을 밝히고자 ‘축성규모’와 ‘행정관련 유물 및 유구’의 분석을 통해 성곽의 군사·행정적 기능변화와 위계를 밝히고자 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주의 신라성곽 중 규모를 산출할 수 있는 20개소를 대상으로 현재 군사분계선이남 서울·경기·인천지역을 공간적 대상으로, 시간적 범위를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엽이후부터 9세기까지로 설정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곽의 규모는 군사적 위계를 반영하여 축성되었음을 확인했다. 축성공역비로 개별 산성을 분류 했을 때 州城은 250억 단위 이상, 郡城은 100억 단위 이상, 縣城은 100억 단위 이하로 분류되었고 이는 기존의 郡縣城으로 비정되는 성곽과 일치한다. 축성공역이 월등히 높은 성곽은 이성산성(315억 단위)이었는데 이는 한주의 치소성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며 이는 선행연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성산성보다도 규모가 더 큰 城이 남한산성(686억 단위)이었다. 이는 축성공역비를 바탕으로 유물·유구·시간적 특징과 함께 해석하면 7세기 중반이후 축성된 남한산성이 8세기 이후 한주의 주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결과가 된다. 이성산성에서는 8세기 이후의 치소성에서 확인되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지 않는 반면 남한산성에서는 ‘麻山停子瓦草’, ‘甲辰城年末村主敏亮’ 등 다수의 명문이 확인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성곽의 행정적 위계를 확인하기 위해 행정관련 유물(목간, 벼루, 인장, 명문와)과 유구(관청, 창고로 사용가능한 대형건물지)를 검토하여 문헌에서 비정되는 군현성과 고고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성의 행정적 활용이 대부분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즉, 축성의 계획단계에서 군사적으로 중요도가 높은 거점에 축성공역비를 높게 투여하여 성곽을 구축하고 군사적 위계를 바탕으로 郡縣制를 재편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성곽의 사용시기를 성내 출토 토기와 성곽의 전면개축이 일어난 시기로 검토하여 1기(6세기 중반-7세기 중반), 2기(7세기 중반-8세기 중반), 3기(8세기 중반에서 9세기)의 3분기로 구분 하였다. 1기에 해당하는 산성 중 이성산성과 죽주산성이 北進期 성곽의 전형에서 벗어나 설계시부터 광역거점으로 계획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기에 새롭게 축성 또는 전면개축되는 성곽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 반월산성이 있었는데 대당전쟁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防備한 성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기에는 두 가지 특징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서해안에 비파산성, 당성 2차성의 축성이다. 이 두성의 축성에는 토석혼축을 사용했고 둘레가 약 1500m에 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신라 下代 군사목적의 軍鎭이 해안가로 집중, 강화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시기에 내륙에 입지하는 호암산성과 할미산성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군사적 중요도가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URI
http://dcollection.hanyang.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103069http://hdl.handle.net/20.500.11754/3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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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CULTURAL ANTHROPOLOGY(문화인류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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