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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 수립(1945~1967)

Title
북한의 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 수립(1945~1967)
Other Titles
Making the National Cultural Tradition and the Anti-Japanese Revolutionary Tradition in North Korea, 1945~1967
Author
류승주
Alternative Author(s)
Ryu, Seung Ju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22. 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Doctor
Abstract
본 논문은 북한 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의 수립과 변화를 국가적 전통 수립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항일혁명전통은 김일성이 지도한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북한 ‘혁명전통’의 시원이자 중심 흐름으로 내세운 것이다. 민족문화전통은 과거로부터 전해내려온 정신적‧물질적 유산 가운데 현대 북한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선별 계승한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북한의 정치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문화적 활동을 통하여 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을 수립하였다. 이 두 전통은 북한의 국가적 전통으로서 뿌리내려 북한사회 및 사상과 문화, 행동양식을 제시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북한사회의 사상‧문화가 정치지도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강제 뿐 아니라, 주변부 정치집단의 공조(共助), 민간 사회문화계의 아래로부터의 열망 등 다양한 주체들의 활동에 의하여 형성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적 학술‧문화운동을 계승하는 한편 ‘민주주의 민족문화’를 수립하려는 목적 하에서 역사학‧고적보존‧문학예술 사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북한 민족문화전통이 출발하였다. 항일혁명전통은 반일 민족해방투쟁을 계승한 ‘인민정권 건설운동’의 정치적 흐름 속에서 마련되었는데, 북한 정권의 중심이자 상징적 인물이었던 김일성을 숭배하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두 전통은 국가건설과 전쟁 수행을 위한 ‘애국주의’ 교양에 활용되면서 국가적 전통으로 성장해 나갔다. 1952년 12월 개원한 과학원은 북한 전후복구와 산업건설을 위한 중앙집권적 학술기구였으며 사상방면의 통합연구기관이었다. 과학원은 한국 과학자들의 오랜 학술운동의 구현체였으며, 국가의 제반 전략을 수행하는 관제 연구기관이었다. 북한 정치지도자들이 과학원을 통하여 북한의 이념적 통합을 의도하였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민간 과학자들이 과학아카데미를 통하여 민족국가 건설을 향한 오랜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역사학과 고고학‧민속학 분야는 자국사 연구 체계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근대국가 정체성 확립의 중요한 과업을 담당하였다. 이들 역사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맑스-레닌주의 이론과 애국주의에 합의하면서 국가적 전통을 만들어 나갔다. 종전(終戰) 후 북한에서는 산업건설 방향과 사회주의 이행 속도롤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그 결과 중공업 우선 노선을 확립하고, 급속한 사회주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물질적 결핍과 광범한 동원이 필수적이었다. 북한의 근대화 노선에 반대하는 소련‧중국의 비난과 간섭 역시 극복해야 했다. 김일성은 1955년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주체”를 확립할 것을 제기하였다. 김일성은 “주체”란 “조선 혁명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곧 ‘북한의 현실적 조건과 목표에 맞게’ 사업함을 의미했다. ‘북한의 현실적 조건’을 구체화하는 과정은 곧 북한의 정체성 확립 과정이었으며, 정체성에는 국가적 전통(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이 포함되었다. 특히 민족문화전통은 ‘주체’의 실현 방법을 보장해주었다. 두 전통은 1950년대 중반 ‘주체’의 테제 하에 상호 보완적인 전통으로서 확립되었다.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항일혁명전통의 위상이 강화되자 민족문화전통은 상대적으로 이념적 중요성이 약화되고 예술과 공업생산에서 민족문화유산의 요소를 활용한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0년 이상 토대를 축적해 온 역사과학의 성과물들은 천리마운동 시기 사회주의적 집단경쟁체제 속에서 대량으로 산출되었다. 저술‧번역 출판물의 양적 증가 속에서, 한국사 전통의 진보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문화전통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1960년대 사회과학에서는 전근대 시대 역사인물과 그 성과가 ‘유물론적’, ‘혁명적’, ‘인민적’인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선조들의 애국주의적 지향이 봉건사회의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당대에는 실현될 수 없었으나, 그 정신만은 현대에 계승되어 “조선로동당의 옳은 지도 하에” 현실화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이는 곧 민족문화전통과 항일혁명전통이 하나의 혁명전통으로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로동당이 1960년 이후 이념적 차원에서 민족문화전통을 언급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학술계의 고전 연구 및 출판 성과에 고무되어 1960년대 중반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지면에는 민족문화 고유의 가치를 강조하는 기사가 늘어났다. 1960년대 당내 2인자로 북한 권력집단의 후계 경쟁구도에 있었던 박금철 이하 갑산파 정치세력은 이러한 민족문화전통의 폭넓은 유용성에 주목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1966년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는 다시금 민족문화전통을 국가적 전통으로 의미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67년 󰡔목민심서󰡕 파동과 갑산파 숙청이 동시 진행되면서 ‘봉건시대’의 전통을 혁명전통과 연결시켰던 논리는 바로 철회·부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권력에 영향받지 않는, 문화의 자율적 권역이 분명히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로동당 지도부는 1960년대 중반 점증해 온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고 후계구도를 확고히 하여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1967년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김일성-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최고지도자가 사상·문화의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갑산파의 숙청과 함께 실학파의 애국주의적-계급주의적 가치는 부정되었으며, 봉건시대의 잔재로 격하되는 등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 작업이 완료되고 주체사상이 내적으로 정리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민족문화전통은 새로이 북한의 국가적 전통 영역에 다시 등장하였다. 최고지도자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민족문화전통은 다시금 북한의 국가적 전통으로 자리잡았고 북한의 체제와 사상, 문화와 예술의 여러 방면에서 토대가 되었다. 이는 북한 당국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 1950~1960년대 자생적으로 성장하여 굳게 뿌리내린 민족문화전통이 1970~1980년대 일련의 굴절을 거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URI
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593684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6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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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SCHOOL[S](대학원) > HISTORY(사학과) > Theses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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