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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Title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Author
김혜미
Advisor(s)
박찬승
Issue Date
2016-02
Publisher
한양대학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1905년에 처음으로 도성과 읍성의 성벽이 훼철되기 시작한 점에 주목하여, 전국적으로 성벽이 훼철된 배경과 훼철 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1890년대 한국에 존재했던 도성과 약 140개소의 읍성은 1905년부터 일본군과 일본인 거류민, 통감부, 한국 지방관리에 의해 훼철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성곽을 꾸준히 보존하려는 입장이었던 반면 통감부는 성곽 훼철에 찬성하였다. 일본인들과 일부 지방 관리들은 주로 도로개설과 성벽 자재 사용 등을 내세워 성곽의 훼철을 주장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성곽의 훼철은 1905년부터 1907년 사이에 평양, 함흥, 안주, 강계, 대구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한 일본군은 주로 한반도 북부지방의 성곽을 허물고 군대의 주둔과 작전 수행에 필수인 도로를 개수하였다 1906년부터 1907년 사이에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 군수 박중양과 일본인 거류민에 의해 제2차 대구읍성의 훼철이 이루어졌다. 일본인 거류민은 대구읍성의 해체에 처음부터 참여했고, 이후 개설된 간선도로 부근 토지를 차지하고 대구의 중심부를 장악해갔다. 대부분 상업 종사자였던 거류민들에게 성벽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서울의 성벽 훼철은 1907년 순종황제가 즉위하고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6일 만에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가 개설되었다. 그 후 위원회는 남대문 북쪽 성벽을 시작으로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 남대문 남쪽 성벽, 동대문 좌우 성벽, 전주읍성과 남원읍성의 성벽 등을 훼철하였다. 또한 지방관리의 요청이나 신작로의 개설로 성곽이 허물어진 경우도 있었다. 대체로 성곽의 훼철은 일본군, 통감부, 일본인 거류민 등 외부세력의 각자 다른 이유로 인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관찰부 소재지를 비롯한 한국의 주요 전통도시와 일본인 거류민 진출한 15곳의 지역에서 성곽이 훼철되었다. 이후 성곽이 훼철된 대부분의 도시에서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로 대구와 전주에서는 시내 주요 간선도로가 완성되었다. 또한 서울과 평양에서는 외곽으로 나갈 수 있는 정차장 부근의 도로가 개설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울, 평양, 대구, 전주에서는 일본인 시가지 부근의 도로가 개수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훼철된 성곽에서 나온 자재로 학교, 다리, 병원 등의 건물이 신축되었다. 1900년대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성곽의 훼철은 서구와 같이 도시의 확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벗어나 내륙의 전통도시에 깊숙이 침투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로 도로의 개설을 위해 성벽이 훼철되었다. 통감부도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들을 도왔다. 이후 일본인 거류민은 성 안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상권을 형성하였다. 이를 통해 행정중심지였던 한국의 전통도시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URI
https://repository.hanyang.ac.kr/handle/20.500.11754/127175http://hanyang.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428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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